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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깅스 차림으로 버스에 탄 여성의 전신을 몰래 촬영한 것은 여성에게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범죄 행위일까요.
공공장소에서 레깅스를 입는 게 적절하냐는 ‘레깅스 논란’부터 법원의 ‘가해자 중심주의’ 비판까지 일으켰던 ‘레깅스 몰카’ 사건. 이 논란의 사건에 대한 법정 다툼이 일단락됐습니다. 1심 법원에서 유죄를 선고했던 사건은 2심에서 무죄로 뒤집히고, 다시 대법원에서 유죄 취지로 2심을 파기 환송하는 등 법원의 판단이 엇갈리며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지난 2일 파기환송심을 맡은 의정부지법 형사2부(부장판사 최종진)는 레깅스를 입은 여성의 하반신을 불법촬영한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의 항소를 기각하며 유죄를 인정한 1심대로 벌금 70만원을 선고했습니다.
2018년 5월 버스 출입문 앞에 선 여성의 엉덩이 부위 등을 몰래 촬영한 8초짜리 동영상을 놓고 벌어진 3년간의 법정 다툼에서 핵심 쟁점은 ‘성적 수치심’이었습니다.
법원은 왜 성적 수치심에 주목했고 심급별로 성적 수치심을 어떻게 달리 판단했을까요. 그리고 최종 결론에 이르게 된 결정적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싹.다.정]에서 살펴봤습니다.
1심 판단은 “노출 없어도 몰래 촬영 성적 수치심 유발”
피고인 A씨는 2018년 5월 오후 10시쯤 버스에서 하차하려고 출입문 앞에 서 있던 피해자 여성 B씨의 엉덩이 부위 등이 포함된 전신을 휴대전화 카메라로 몰래 동영상으로 찍었습니다. A씨가 촬영한 영상은 특정 부위를 확대하거나 부각하진 않았습니다. 특별한 각도나 특수한 방법을 이용하지 않았고, 통상 사람의 시야에 비치는 전신을 그대로 촬영한 것이었죠.
당시 B씨는 간편한 운동복 차림이었습니다. 엉덩이 윗부분까지 내려오는 다소 헐렁한 회색 운동복 상의에 발목까지 내려오는 검은색 레깅스 하의를 입고 있었습니다. 직접 맨살이 드러나는 부위는 목 윗부분과 손, 발목 등으로 일부였습니다.
범행은 B씨가 자신이 찍히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면서 들통났습니다. A씨는 “바로 지우겠다. 한 번만 봐달라”며 용서를 구했지만 B씨는 경찰에 신고했고, A씨는 현장에서 검거됐습니다. A씨는 경찰 수사 과정에서 “얼굴과 전반적인 몸매가 예뻐 보여 촬영했다”며 몰래 촬영한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이에 B씨는 “기분이 더럽다, 어떻게 저런 사람이 있나”라며 분노를 표출했습니다.
A씨는 ‘카메라나 그 밖에 이와 유사한 기능을 갖춘 기계장치를 이용해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의 신체를 그 의사에 반하여 촬영’하는 행위를 처벌하도록 한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14조 1항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1심 재판부의 판단은 유죄였습니다. 의정부지법 고양지원은 레깅스를 입은 B씨의 맨살 노출이 없었어도 촬영 부위가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신체에 충분히 해당한다며 A씨에게 벌금 70만원을 선고했습니다.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24시간 이수 명령과 함께였죠.
A씨는 형량이 무겁다며 항소했고, 사건은 2심으로 넘어갔습니다.
“레깅스=일상복, 성적 수치심 단정 어렵다” 2심의 무죄
2심을 맡은 의정부지법 형사항소1부는 1심을 완전히 뒤집어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A씨 행위가 부적절하고 피해자에게 불쾌감을 준 사실은 인정했지만, 성범죄는 아니라는 판단이었습니다. 재판부는 “레깅스를 입은 젊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성적 욕망의 대상이라 할 수 없고, 피해자가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재판부는 B씨의 옷차림과 노출 정도, 촬영 각도 등을 집중적으로 심리했다고 설명했죠. 사안별 2심 재판부의 판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옷차림) 피해자가 입은 레깅스가 비슷한 연령대 여성들 사이에서 일상복으로 활용되고, 신체에 밀착해 몸매를 드러난다는 점에서 스키니진과 별반 차이가 없음. 피해자 역시 일상적인 옷차림으로 대중교통에 탑승함.
(노출 정도) B씨의 옷차림에서 외부로 직접 노출되는 신체 부위가 목 윗부분과 손, 레깅스 끝단과 운동화 사이의 발목 부분이 전부임.
(촬영 방법) A씨가 몰래 촬영한 것은 맞지만 특별한 각도나 특수한 방법이 아닌 사람의 시야에 통상 비치는 부분을 그대로 촬영함.
(신체 부위 부각 여부) A씨가 피해자의 상반신부터 발끝까지 오른쪽 뒷모습을 촬영하면서 피해자의 엉덩이 부위를 부각해 촬영하지 않음.
그리고 결정적으로 피해자의 진술에서 드러난 성적 수치심 여부에 대한 판단이 무죄 선고의 근거가 됐습니다. 당시 피해자 B씨가 표현한 “기분이 더럽다” 등은 불쾌감을 넘어 성적 수치심을 드러낸 것으로 단정하기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A씨의 휴대전화에서 추가로 확인된 영상이 없었고, 피해자가 피고인에 대해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밝힌 것도 무죄 판단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논란 불붙은 ‘가해자 중심적 관점’
그러나 2심 판결은 즉각 사회적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법원이 당사자의 동의를 받지 않은 ‘불법촬영’이라는 행위보다 피해자 여성의 옷차림이나 노출 정도 등에 중점을 두고 판결을 내린 것은 ‘가해자 중심적 관점’이라는 비판이 나오면서입니다.
특히 ‘성적 수치심’이라는 피해자의 감정을 법원이 판단할 수 있느냐는 지적과 함께 애초에 ‘성적 수치심’을 성범죄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느냐는 문제 제기가 이어졌습니다.
사실 2심 재판부가 ‘성적 수치심’을 따져본 것은 2016년 대법원 판례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한 남성이 여성들을 쫓아다니면서 200여장을 불법촬영한 혐의로 기소된 사건인데, 대법원 형사2부(주심 이상훈 대법관)는 당시 사진 속 여성들의 신체 노출이 없어 성적 수치심을 유발한다고 보긴 어렵다는 취지로 무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당시 대법원은 “촬영한 부위가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신체’에 해당하는지”를 판단할 때 “객관적으로 피해자와 같은 성별, 연령대의 일반적이고 평균적인 사람들의 관점에서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신체에 해당하는지” 봐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피해자의 옷차림, 노출 정도와 촬영자의 의도, 촬영 장소와 각도 및 거리, 특정 신체 부위의 부각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해야 한다는 기준도 이 판결에서 제시됐던 것이었습니다.
판단 바꾼 대법 “성적 대상화 되지 않을 자유” 첫 판시
사건은 검찰의 상고로 다시 대법원의 판단을 받게 됐습니다. 대법원 1부(주심 김선수 대법관)는 지난해 12월 A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2심을 유죄 취지로 다시 뒤집고 사건을 의정부지법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대법원은 이 판결에서 ‘성적 자유’의 개념을 ‘자기 의사에 반해 성적 대상화가 되지 않을 자유’로 처음 구체화했습니다. ‘원치 않는 성행위를 하지 않을 자유’라는 기존 개념을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대법원은 이 개념 정의를 근거로 성적 자유를 침해당했을 때 피해자가 느끼는 성적 수치심에 대해 “부끄럽고 창피한 감정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분노, 공포, 무기력, 모욕감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성적으로 부끄럽거나 창피한 감정을 표출한 경우만 성적 수치심으로 인정할 경우 피해자가 느낄 수 있는 다양한 감정을 소외시킬 뿐 아니라, 피해자는 부끄러워해야만 한다고 강요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대법원은 레깅스가 일상복으로 활용된다거나, 노출이 없다는 점 등도 무죄 근거가 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피해자가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거나 생활 편의를 위해 공개된 장소에서 자신의 의사에 의해 드러낸 신체 부분이라 하더라도, 이를 본인 의사에 반하여 함부로 촬영당한다는 것만으로 성적 수치심이 유발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대법원의 이 같은 취지를 받아 파기환송심 재판부는 첫 1심 판결에 대한 A씨의 항소를 기각했습니다. A씨가 재상고하지 않는 한 1심이 내린 70만원 벌금형이 그대로 확정됩니다. A씨가 재상고하더라도 대법원의 파기 환송 취지는 유지된 채 형량 적정성만 판단할 수 있어 유죄 판단은 유지됩니다.
“노출 여부나 입은 옷의 종류, 성적수치심의 종류 등과 무관하게 누군가의 신체를 몰래 촬영한다면 성범죄로 볼 수 있다”는 판단이 이제 하나의 대법원 판례로 완결된 것입니다.
정우진 기자 uzi@kmib.co.kr
[싹.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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