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는 2일 월미공원에서 ‘월미도 원주민 희생자 위령비 제막식’을 개최했다고 밝혔다.
이날 행사는 월미도 원주민 귀향대책위원회(위원장 한인덕) 주관으로 개식사, 감사패 전달, 합창단 공연, 위령시 낭독, 제막 행사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월미도원주민귀향대책위원회 유족회원과 박남춘 인천시장, 신은호 시의회의장, 정근식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장, 홍인성 중구청장 등 30여명이 참석했다.
월미도 원주민 희생자 위령비는 제1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진실규명 결정에 따른 권고사항을 반영해 인천시가 위령사업의 일환으로 건립했다.
향후 인천상륙작전 당시 무고하게 희생된 월미도 원주민 희생자의 넋을 기리고 전쟁의 참상을 기억하기 위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될 계획이다.
박남춘 시장은 “이 자리에 세워진 위령비를 통해 다시 한 번 원주민 희생자의 영령을 추모하며 남겨진 유족들의 아픔을 치유하고 회복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 하겠다”고 밝혔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정근식 위원장은 추도사에서 “한국전쟁 기간 중에 월미도에서 희생된 분들의 명복을 빌고, 뒤늦게나마 이들을 추도하기 위한 위령비가 세워지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며 “월미도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대표적인 수난의 현장이었다. 이 섬은 19세기 후반 프랑스와 미국이 우리나라를 엿보는 관문이었고, 뒤이어 일본, 청, 러시아의 군사전략적 각축장으로 전락했다. 결국 1904년 러일전쟁의 영향으로 53가구의 마을 주민들은 섬의 북쪽에서 이주해야 했고,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묵은 마을’에서 ‘해안 마을’로 또다시 이루어졌다. 조국은 광복을 찾았지만 월미도의 주민들은 평안을 찾지 못했다. 6.25전쟁으로 인하여 더 큰 고통이 더해졌다.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하여 수행한 인천상륙작전에서 월미도는 연합군의 교두보로 선정되었다. 1950년 9월 10일과 12일 미군은 월미도를 폭격했고, 이로 인하여 100명에 이르는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우리는 이분들 중에서 10명의 이름만 기억할 뿐 나머지 희생자들은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1953년 휴전이 이루어졌지만, 주민들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후 이 곳이 미군기지로 사용되었고, 1970년대 초반부터는 한국 해군기지로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생활의 터전을 잃어버린 월미도 주민들은 1997년 귀향대책위원회를 결성하였고, 2004년부터는 고향을 돌려받기 위한 적극적인 호소를 시작했다.
2008년 1기 진실화해위원회는 한국전쟁기 월미도 폭격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고, 주민들이 겪은 재산상의 피해는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는 권고를 하였다. 이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희생자 위령비를 제막할 수 있게 되었지만, 월미도 주민들의 마지막 숙원은 실현되지 않고 있다.
2기 진실화해위원회는 이미 이루어진 진실규명과 권고를 존중하며 이것이 실현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런 관심의 하나로 소식지 1호의 표지에 월미도 폭격에도 살아남은 ‘평화의 나무’ 사진을 게재한 바가 있다.”고 언급했다.
인천=정창교 기자 jcgy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