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분의 아이들 세상]떼쓰는 아이

입력 2021-11-02 11:31

7세 남아인 J는 떼가 심하고 말을 듣지 않는다. 부모의 눈치를 봐가며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말썽을 피운다. 하고 싶은 것을 못하게 제지할라치면 떼를 쓰며 넘어가는데 당해낼 재간이 없다. 그런데 어린이 집에선 말도 잘 듣고 규칙도 잘 지키고 바른 생활 어린이라고 한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해서 그런가 생각하며 엄마는 우울해졌다.

하지만 엄마와 자세히 이야기를 해보니 엄마의 우울감은 훨씬 오래전에 시작되어 있었다. 엄마는 J를 임신한 기간 동안 남편이 잠시 외도를 했던 걸 나중에 알게 되었다. 남편이 사과하고 뉘우치며 잘해 주려고 노력했지만 변명처럼 느껴지고 위선처럼 생각되어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았다. 아이를 임신하고 10달을 고생한 자신을 속였다는 배신감, 억울함, 분노등과 바보같이 속은 자신에게 화가 나고 남편이 불결하게 느껴져 견딜 수가 없었다. 무엇 보다‘버림 받았다’는 느낌이 가장 힘들었다.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드니 이런 감정을 통제하려고 애썼다. 남편에 대한 관심도 철수해 버리고 성관계를 비롯해 모든 관계를 단절해 버렸다. 그래야 아이를 돌보고 살 수 있을 거 같았다.

애착 손상‘이란 말이 있다. 삶의 결정적인 순간에 배우자에게 버림받거나 배신을 경험하는 것을 말한다. 이럴 때 상처받은 사람은 사건의 기억이 반복적으로 떠올라 시달리고, 트라우마와 같이 과잉 각성된다. 이에 대한 방어기제로 가해자와 관계에서는 상호작용이 무감각해진다. J의 엄마는 남편에게서 애착손상의 트라우마’를 겪은 거다.

아빠는 아내에게 사과를 할 만큼 하였고, 반성도 했다고 생각하는데 갈수록 아내의 반응이 지나치게 느껴졌다. 아내가 이럴수록 아빠 또한 자신이 가족에게 불필요한 존재라는 느낌이 들었다. 회사나 친구들만이 자신을 인정해 준다고 느껴 더욱 밖으로 나돌고 육아에도 거의 도움을 주지 않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부부는 서로 정서적으로 단절된 채 오랜 세월을 지냈고 엄마는 아이를 위해 자신의 결혼 생활쯤은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J에게만 몰입했다.

치료를 하면서 엄마는 억눌러 놓았던, 자신과는 분리되었다고 생각했던, 분노, 슬픔과 실망감, 억울함 등등의 감정을 떠올렸다.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느낌이 어린 시절 이혼으로 가족을 떠났던 친정아버지에 대한 감정과 겹쳐지면서 더욱 고통스러웠다. 감정을 분리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살아있기 힘들었을 거라고 말했다. 아이에게 부모 이혼의 상처만은 주지 않으려니 어쩔 수 없이 무감각하게, 냉담하게 살았다고 말했다. 남편에게 의지하고 보호를 받고 싶은 적도 많았으나 다시 거절당할까 두려웠다고 솔직한 감정을 표현하였다. 처음에는 오래된 이야기라며 회피하던 아빠도 아내의 버림받은 심정을 들은 후에는 아내의 슬픔에 공감하면서 후회하는 마음을 표현하였다. 자신도 가족에게서 느꼈던 소외감과 공허함을 표현하였다. 서로의 감정을 표현하고 인정해 주는 것은 애착 손상을 치유하는 첫 단계이다.

이런 화해는 엄마가 자기 방어(감정의 분리)를 포기하고 감정을 받아들이면서 시작되었다. 인간은 너무 고통스런 감정, 생각이 있을 땐 당연히 도망치고 회피하고 싶어진다. 생존하기 위한 몸부림일 수 있다. 물론 고통스런 감정으로부터 피해 있으면 일시적으로는 다소 편안해질 수 있다. 하지만 감정, 생각 등은 제거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 더 강력한 모습으로 변신을 해서 다시 공격한다. 제거할 수 없음을 알고 감정에 머무르며 자신을 스스로 위로해 주자. 날카롭게 맞서 싸울 일도 아니고, 무시할 일도 아니다.

부부관계가 회복되니 엄마와 아빠는 J양육에 대한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대화하면서, 아이에 대해서도 적절한 사랑과 통제의 선을 지켜나갔다. J의 문제행동도 저절로 사라졌다.

이호분(연세누리 정신과 원장, 소아청소년 정신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