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희 옵/신 페스티벌 감독 “‘다원예술’은 예술 장르가 아닙니다”

입력 2021-10-31 15:44 수정 2021-10-31 17:20
김성희 옵/신 페스티벌 예술감독이 지난 27일 서울 종로구 옵/신 스페이스(서촌공간 서로)에서 올해 2회째를 맞은 축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권현구 기자

국제 동시대 예술의 흐름을 보여주는 다원예술 축제 ‘옵/신 페스티벌 2021’이 29일 개막했다. 12월 5일까지 열리는 옵/신 페스티벌은 무용, 퍼포먼스, 영상, 설치, 테크놀로지 등 다방면의 예술 영역에서 활동하는 10개국 예술가들의 작품 총 25편을 대학로예술극장, 문래예술극장, 문화비축기지 등에서 선보인다.

아직은 낯선 축제지만 옵/신 페스티벌에 주목하게 되는 것은 바로 김성희 예술감독 때문이다. 김성희 감독은 2002~2005년 국제현대무용제(MODAFE) 프로그램 디렉터를 거쳐 2007년 국제다원예술축제 스프링웨이브 페스티벌에 이어 2008년 페스티벌 봄을 창설해 2013년까지 예술감독으로 활약했으며 2013~2016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 초대 예술감독, 2017~2018년 국립현대미술관 다원예술 감독을 역임하며 다원예술을 한국에 자리 잡도록 만든 주역이다.

“위기의 시대에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지난 27일 서울 종로구 옵/신 스페이스(서촌공간 서로)에서 만난 김 감독은 “오늘날 예술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이러한 위기에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과 함께 예술의 좌표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면서 “이러한 고민을 함께하는 예술가들의 목소리를 보여줄 새로운 페스티벌로 만든 게 옵/신 페스티벌이다”고 말했다. 이어 “옵/신 페스티벌은 모든 가능성이 닫히고 있는 오늘날,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효율적이지만 고집스럽게 그 가능성을 상상하면서 관객에게 제안해 줄 예술가들과 함께하려 한다”고 덧붙였다.

임고은의 '아키펠라고 맵'삼부작 가운데 첫 작품인 '세 개의 고래-인간 동그라미'(위)와 잉그리 픽스달 안무 '내일의 그림자'의 한 장면. 사진 제공: 옵/신 페스티벌 ⓒ 임고은 · Anders Lindén

올해 옵/신 페스티벌이 내세우는 작품들은 낯설지만 흥미롭다. 우선 영상 및 퍼포먼스 작가 임고은의 ‘아키펠라고 맵’ 3부작은 인류가 마주하고 있는 위기 속에서 야생을 회복하기 위한 시적 언어를 찾는 작품이다. 그리고 포스트댄스 담론을 이끄는 세계적인 안무가 마텐 스팽베르크(스웨덴)가 잉그리 픽스달(노르웨이)이 각각 한국 무용수들과 작업한 ‘휨닝엔’과 ‘내일의 그림자’도 관객과 만난다. 차이밍량(대만), 아피찻퐁 위라세타쿤(태국), 라브 디아스(필리핀) 등 아시아 영화 거장들의 실험적인 영화들, 미국 극단 네이처 시어터 오브 오클라호마의 B급 좀비 호러물. 그리고 테크놀로지에 기반을 둔 로이스 응(홍콩)과 정금형의 공연들도 준비됐다. 이어 옵/신 페스티벌이 제작, 위촉, 초청한 13편의 작품이 문화역 서울 284에서 ‘가상 정거장’ 이라는 타이틀의 전시로 소개된다. 호추니엔(싱가포르), 고이즈미 메이로(일본), 서현석, 김지선 등 국내외 작가들이 VR, AR, 웹-투어, 사이보그 등 다양한 기술 매체를 거쳐 작품을 선보인다.

옵/신 페스티벌은 다원예술의 플랫폼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페스티벌 봄을 잇고 있으면서도 보다 확장된 모습이다. 우선 옵/신 페스티벌은 ‘다원예술’이란 용어를 의식적으로 사용했던 페스티벌 봄과 달리 의식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있다. 장르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는 예술 창작활동과 다양한 예술적 가치를 기반으로 하는 창작활동을 의미하는 다원예술은 200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다원예술 소위원회를 설치하면서 공식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기존의 예술 장르로 분류하기 모호해 지원 사각지대에 있던 예술 활동을 한데 묶어 효율적으로 지원 및 관리하기 위한 정책 용어로 만들어졌다.

페스티벌 봄에서 옵/신 페스티벌에 이르기까지

“페스티벌 봄도, 옵/신 페스티벌도 동시대 예술을 다루고 있습니다. 페스티벌 봄을 시작할 때 ‘국제다원예술축제’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요. 현대예술의 특징이 장르주의를 해체하려는 ‘다원성’인데, 이걸 우리나라에서 다원예술이라는 장르로 부르는 것은 이상하죠. 하지만 페스티벌 봄 당시 한국에서 문화예술위원회 등 공공에서 어떤 장르에도 끼지 못하는 예술을 지원하기 위해 행정적으로 ‘다원예술’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페스티벌 봄도 공적 지원을 받기 위해 전략적으로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옵/신 페스티벌부터는 ‘다원예술’이란 용어를 최대한 사용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다원예술에 대한 한번은 정리가 필요한 것 같아서 다원예술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저희가 스스로 다원예술이 장르가 아니라 현대예술의 특성임을 말하고자 합니다.”

옵/신 페스티벌의 '가상 정거장'에서 선보이는 '에란겔: 불가능한 공동체'와 고이즈미 메이로의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 사진제공 옵/신 페스티벌 © Aichi Triennale 2019 Photo_ Shun Sato

‘다원예술’이란 용어가 이제는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의미가 불분명하다거나 혼선을 불러일으킨다는 등의 비판은 여전하다. 하지만 장르주의가 뿌리깊은 한국에서 행정적으로 ‘다원예술’이란 용어를 만들어 다양하고 실험적인 예술 활동을 지원함으로써 동시대 예술이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 김 감독은 “행정적 장치로 ‘다원예술’이 만들어졌지만 그런 카테고리와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동시대 예술이 앞으로 나갈 힘을 얻었다. 최근 국제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한국의 젊은 예술가들은 이런 제도의 도움을 얻었다”면서 “한국처럼 장르주의가 심한 일본을 비롯해 해외에선 한국의 이런 지원을 부러워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옵/신 페스티벌을 제2의 페스티벌 봄이라고 불러야 할까. 동시대 예술을 다룬다는 방향성 면에서 연장선에 있지만 김 감독은 큰 차이가 있다고 강조한다. 옵/신 페스티벌은 10여 년에 만들어진 페스티벌 봄이 국제적 조류를 소개하는 데 치중했던 것에서 나아가 한국을 넘어 아시아 동시대 예술의 발굴하고 제작하는 것에도 힘을 쏟고 있다는 것이다.

“페스티벌 봄을 처음 만들 때는 한국 예술계가 국제 예술계의 변화와 동떨어진 채 자신만의 세계에 있는 것 같아서 답답함을 느꼈어요. 그래서 축제 초기에는 그 시간차를 줄이기 위해 과할 정도로 유럽과 미국의 중요 현대예술 사조를 이해하는 데 열쇠가 되는 작품을 소개하려고 애썼던 것 같아요. 다만 농당스(non-danse)나 포스트드라마 연극을 소개했을 때 국내 연극계와 무용계의 반응은 차가웠죠. 하지만 몇 년 안 돼 정금형 박민희 김지선 정은영 임민욱 등 젊은 작가들이 등장해 국제 현대예술 신에서도 주목받게 됐습니다. 그리고 현재 한국 연극계와 무용계 역시 이런 흐름이 중요하게 자리 잡았습니다. 페스티벌 봄이 한국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발굴하고 제작해 국제무대에 내보내기 시작할 무렵 제가 아시아문화의전당 예술극장 예술감독으로 가게 됐습니다. 아시아문화의전당 예술극장의 경우 설립 때부터 ‘아시아 컨템포러리의 허브’라는 미션이 주어진 상황이었는데, 저에게는 다시 한번 성장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한국 작가들만 놓고 고민하던 데서 아시아 작가들로 범위를 확장하게 됐으니까요. 사실 아시아에서는 한국 일본 싱가포르 정도가 제작할 수 있는 조건과 능력을 갖추고 있는데, 한국이 아시아 예술극장을 통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선 셈이죠. 그리고 저는 아시아 컨템포러리 예술을 국제 무대에 알리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닐 수 있었죠. 그리고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한 네트워킹과 프로듀싱 능력이 옵/신 페스티벌로 이어진 겁니다. 이제 우리는 해외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실제로 해외에선 아트&테크놀로지 관련해서는 한국에게 기대하는 바가 커요.”

2008년 페스티벌 봄 포스터와 2020년 옵/신 페스티벌 포스터.

동시대 예술, 어려운 것이 아니라 친숙하지 않은 것이다

사실 옵/신 페스티벌은 올해가 2회째다. 지난해 작은 규모로 1회를 조용히 시작했었다. 지난해 축제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축제를 앞두고 김 감독의 멘토였던 ‘유럽 동시대 예술의 대모’ 프리 라이젠의 타계 소식에 김 감독이 슬픔에 빠져서였다.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하기도 했던 라이젠은 장르의 경계를 초월해 유럽의 주요 예술축제들을 창설, 감독, 지원한 것으로 유명하다. 벨기에 쿤스텐 아트 페스티벌, 독일 베를린 페스트슈필 축제, 오스트리아 빈 페스티벌 등의 예술감독을 역임한 그는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예술가들을 발굴하고 지원해 수많은 프로듀서의 롤모델이 됐다. 특히 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 설립 초기 김 감독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었다.

김 감독은 “내게 동시대 예술의 길을 보여준 라이젠 감독님은 늘 ‘컨템퍼러리란, 예술가들이 동시대에 목격하고, 생각한 것들을 자신이 선택한 이 시대의 수단으로 표현한 모든 것을 뜻한다”고 말하곤 했다”면서 “지난해 코로나19 때문에 옵/신 페스티벌을 크게 홍보하기도 어려웠지만, 개막을 얼마 앞두고 감독님 별세 소식을 듣고 한동안 마음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축제 개막 이후에야 겨우 마음을 다잡고 현장에 나올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옵/신 페스티벌이란 이름은 김 감독이 영상작가 겸 이론가 서현석 연세대 교수 등과 2011년부터 지금까지 발행하고 있는 잡지 ‘옵/신(Ob/Scene)’에서 가져온 것이다. 옵/신은 ‘장(scene)으로부터 벗어나다(ob)’의 의미다. 김 감독은 “나와 축제를 함께 하는 동료들은 스스로 마이너리티가 되기로 작정한 사람들이다. 우리가 다루는 실험적 예술이 메인스트림이 되면, 우리는 다시 주변부로 갈 것이다”면서 “우리가 다루는 작품들에 대해서 많은 사람이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친숙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낯설지만, 시간이 지나면 메인스트림이 된다. 이 얘기를 페스티벌 봄 때는 자신 있게 못했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됐다”고 강조했다. 이어 “수많은 축제가 있지만 하나 정도는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고 싶은 예술가와 호기심 많은 관객을 위한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역할을 옵/신 페스티벌이 기꺼이 맡고 싶다”고 덧붙였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