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 그때 반성했다면”…법관 탄핵 각하 ‘소수의견’

입력 2021-10-30 07:25 수정 2021-10-30 21:58
4.16연대, 민주노총,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사법농단 관련 결정에 대한 기자회견을 열고 입장을 밝히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이날 양승태 사법부 시절 재판에 관여한 혐의로 헌정사상 처음 진행된 임성근 전 부산고법 부장판사의 탄핵심판 사건을 '각하'했다. 연합뉴스

헌정사 첫 법관 탄핵심판 사건을 맡았던 9인의 헌법재판관 중 김기영 재판관은 과거 신영철 전 대법관의 재판개입 사건을 폭로했던 인물이다. 비록 재판관 다수(5인)가 28일 ‘퇴직한 법관은 탄핵할 수 없다’는 논리에 따라 임성근 전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 부장판사의 재판개입 행위에 따른 탄핵소추를 각하했지만, 김 재판관은 그와 별개로 과거 경험을 언급하면서 소신을 담은 소수의견을 결정문에 남겼다.


김 재판관은 결정문에서 2008년 신 전 대법관의 재판개입 사건을 언급했다. 그는 “당시 재판관여 사건과 이후의 진행 경과를 보면 전국적으로 판사회의를 통한 명백한 재판권 침해라는 의견표명과 국회에서의 탄핵소추안 발의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어떠한 공적 확인과 해명이 이뤄지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때 사법부 진지한 반성 있었다면”

김 재판관은 2008년 당시 서울중앙지방법원장이던 신 전 대법관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사건’과 관련해 판사들에게 ‘재판을 미루지 말고 빨리 선고하라’는 취지의 이메일을 보낸 사실을 폭로했다. 대법원 진상조사단은 이를 재판 내용과 진행에 관여한 것으로 볼 소지가 있다고 결론 내렸다. 이후 17개 법원에서 법관회의가 열렸고, 500명 가까운 판사들이 재판권 독립이 침해됐다는 입장을 냈다. 신 전 대법관에 대한 탄핵소추안은 2009년 11월 국회 본회의까지 올랐으나 72시간 내 표결이 이뤄지지 않아 결국 폐기됐다. 신 전 대법관은 임기 6년을 모두 채우고 퇴임했다.

신영철 전 대법관. 국민일보

임 전 부장판사 사건도 신 전 대법관 사례와 유사하게 일선 법관의 재판에 개입한 구조를 갖고 있다. 임 전 부장판사는 2015년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 부장 재직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을 명예훼손한 혐의로 기소된 가토 다쓰야 전 일본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 등의 재판에 개입한 혐의(직권남용)로 재판에 넘겨졌다. 1·2심은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1심은 “위헌적 행위”라고 적시하면서도 직권남용에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봤다. 항소심은 그마저도 “부적절한 행위”로 수위를 낮췄다. 임 전 부장판사는 지난 2월 국회에서 탄핵소추됐지만 같은 달 28일 임기만료로 퇴직했다.

사법행정권을 남용해 재판에 개입한 혐의를 받는 임성근 전 부산고법 부장판사가 지난 8월 12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항소심 선고 공판을 마치고 취재진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서울고법 형사3부(재판장 박연욱)는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혐의로 기소된 임성근 전 부장판사에게 1심과 같은 무죄를 선고했다. 뉴시스

김 재판관은 임 전 부장판사의 사건 경과를 지켜보면서 신 전 대법관과 얽힌 기억을 떠올린 것 같다. 그는 “만약 당시 사법부 내의 법관 독립 침해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반성적 고려가 있었다면 그로부터 불과 몇 년이 지난 후 같은 법원의 수석부장판사로 부임한 피청구인이 감히 법관들의 구체적인 재판에 개입하거나 관여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성토했다.

김 재판관 "현상만 볼 것 아냐" 지적

김 재판관은 다수 의견이 놓친 부분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임기만료에도 불구하고 심판 이익의 여부는 현상과 결과만 놓고 볼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헌법상 법관 독립 원칙의 제도적 취지, 연혁, 전개 과정에 관한 헌정사적 배경을 검토해서 탄핵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는 취지다.

구체적으로 “법관의 임기제와 연임제는 법관의 책임성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며 “법관의 직무수행 과정에서 발생한 위헌·위법 행위에 대해 임기만료 이후에 법적 책임을 추궁하는 것은 오히려 법관의 임기제와 연임제 취지에 부합한다”고 주장했다. 법관의 임기제는 헌법기관의 책임을 강조하는 데 의미가 있는 만큼, 퇴직 여부와 무관하게 위헌·위법행위 여부를 판단하는 게 오히려 온당하다는 의미였다.

유남석 헌법재판소장이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임성근 전 부장판사의 파면 여부 판단 탄핵심판 사건의 선고 공판에 입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 재판관은 임 전 부장판사의 재판 개입 행위에 대해 “우리 사법의 제도적 근간과 법의 지배를 바탕에 둔 법치주의를 훼손한 행위”라며 “반복돼서는 안 될 중대한 위헌적 행위”라고 지적했다. 또 “사법행정 담당자로서 소속 법원 법관들이 부당한 영향이나 간섭 없이 공정하게 판단하도록 지원할 책무를 저버렸다”며 “헌법적으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중대한 행위”라고 말했다.

끝으로 김 재판관은 “사법의 독립과 책임에 관해 이번 탄핵심판에서 담아내지 못한 제도적 한계가 있다”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이제부터라도 진지하게 시작돼야 한다”고 헌재 다수 의견에 대한 아쉬움을 남겼다.

‘위헌 여부만 판단’ 요청…“전례 없다”
이날 임 전 부장판사의 탄핵소추 인용 의견을 낸 건 김 재판관과 유남석 헌재소장, 이석태 재판관 3인에 그쳤다. 이선애 이은애 이종석 이영진 이미선 재판관은 단순 각하 의견, 문형배 재판관은 각하와 유사한 심판절차 종료 의견을 냈다.

탄핵소추를 청구한 국회 측 소송대리인단은 탄핵 여부와 별개로 임 전 부장판사의 재판개입 행위에 대한 위헌·위법 여부 판단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수 의견은 “노무현·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심판 때도 각각 기각 또는 파면 주문만 선고했을 뿐 위헌·위법확인 여부 만을 독립적으로 선고하지 않았다”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구자창 기자 critic@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