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근택은 제주 출신으로 부산대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문학평론가 지망생이었지만 광주육군보병학교에서 교관으로 근무하며 인연을 맺은 박서보의 권유로 미술평론가가 됐다. 1958년 발표한 ‘회화의 현대화 문제’는 출세작이다. 그는 이 글에서 “현대라는 상황에 처한 예술가가 무엇을 그릴 것인가. 그 길을 앵포르멜 회화의 표현주의에서 찾아야 한다”라고 주장, 당대 추상미술인 앵포르멜의 이론적 정초를 제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가 미술평론가로 활동을 시작했던 당시는 한국 미술에서 쟁쟁한 평론가들이 월북하고 남한에서는 이경성정도만이 활동할 정도로 토양이 척박했다. 혜성처럼 등장한 그의 날카로운 비평은 단연 주목을 끌었다. 박서보의 대표작인 묘법을 불어 ‘에크리튀르(Ecriture)'로 번역해준 이도 그였다.
하지만 검열의 시대였던 박정희 정권하에서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며 1968∼70년 공식적으로 글을 발표할 수 없었다. 또 박서보를 비롯한 추상화 작가들이 정부의 민족기록화 사업에 대거 참여한 것을 직설적으로 비판하면서 미술계에서 설자리를 잃었다. 더는 미술잡지에 발표하지 못하고 ‘문학사상’ ‘시문학’ 등 문학잡지에 글을 실어야했다. 또 70년대 중반부터 이일, 유근준 등 유학파 평론가들이 등장하면서 그는 미술계 무대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평전을 쓴 제주 출신 미술평론가 양은희씨는 26일 “족적에 비해 사후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하는 게 안타까웠다. 평전이 그를 다시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