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는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했다. 이토 저격 사건 대책본부를 맡은 일본 외무성은 1912년 4월까지 2년 6개월에 걸쳐 혐의자 및 연루자 색출, 재판 절차 지원, 변호인단 동향 파악, 각국 반응 분석 등을 위해 1778건의 문서를 생산했다. 이 자료가 외무성 산하 외교사료관에 보관돼 있는 ‘이토공작만주시찰일건(伊藤公爵滿洲視察一件)’이다.
이태진(78)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가 원장을 맡고 있는 한국역사연구원이 전체 11권 분량의 이 자료들을 수록한 ‘그들이 기록한 안중근 하얼빈 의거’(태학사)를 출간했다. 책에는 ‘이토공작만주시찰일건’ 각 권의 기본 정보와 이 자료를 생성한 기관을 정리한 ‘자료집의 구성’, 주요 자료 24건에 대한 원문·번역문·해설, ‘자료 총목록’ 등이 수록됐다. 또 원본 자료 전체를 사진 파일로 담은 DVD가 포함됐다.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이 원장은 2009년부터 도쿄 외교사료관을 방문해 자료를 보고 복사하고 해독해왔다. 이 원장은 “‘이토공작만주시찰일건’은 하얼빈 의거에 대한 가장 일차적인 자료이자 결정적인 자료”라며 “이 자료를 활용해서 안중근 연구가 보다 본격적으로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주요 자료 24건 중 ‘한황(韓皇)의 밀사 송(宋) 모에 관한 건’은 고종이 안 의사를 지원하기 위해 밀사를 파견했음을 보여준다. 연해주에서 조직된 안중근 구제회 동향에 대한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의 1910년 2월 22일 보고로 “27일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송선춘 조병한 두 사람은 옥중의 안중근을 구출하기 위해 태황제폐하의 친서를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란 내용이 있다.
안중근 구제회는 안 의사 신병이 일본 법정으로 넘어가자 국제변호인단 구성, 안중근 가족 생계 지원 등을 위해 조직된 단체다. 보고 문건에는 안중근 구제회가 특사들을 보고 처음에는 의심했지만 곧 황제가 보낸 사람인 것을 확인하고 서로 협의하고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1909년 12월 하얼빈 총영사가 외무대신에게 보낸 보고에는 ‘우에하라 육군소좌가 다년간 사용한 통역 한국인 최상운(崔尙雲)’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온 한국인 김태원(金泰元)’을 밀정으로 사용하여 정탐하고 있음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 “이 방법을 계속하는 것 외에는 없다고 사료되므로 앞으로는 필요한 비용을 지불하여 보냄과 동시에 장려하는 뜻으로 수시로 상당한 보수를 주어 극력 정보 수집에 힘쓸 생각”이라는 내용이 들어있다. 이 자료가 중요한 이유는 한국인 밀정을 고용한 일본의 감시와 탄압이 이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안 의사의 마지막 모습에 대한 기록도 있다. “안중근은 지난밤 고향에서 보내온 명주 조선복을 입고 성화(聖畫)를 품고 있었는데, 그 태도, 얼굴색, 말씨 등이 평상시와 조금의 차이도 없이, 조용하고 침착하고 깨끗하게 죽음으로 나아갔다.”
1910년 3월 16일 오전 10시 사형 집행에 임한 안 의사의 모습을 담은 ‘살인범 안중근의 최후’라는 이 문건은 그동안 통역을 담당한 경찰 소노키 스에키의 기록이다. 안 의사는 성화를 주머니에 넣은 채 사형장에 들어갔고, 사형 집행 시 이 성화를 꺼내 들고 있었다고 한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