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의 슬픈 진화… 내전의 비극이 ‘상아’ 없앴다

입력 2021-10-24 11:14 수정 2021-10-24 12:35
AP연합뉴스

내전으로 아프리카에서 밀렵이 성행하자 상아(엄니) 없이 태어나는 코끼리가 늘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21일(현지시간) 미국 프린스턴대의 로버트 프링글 교수 등은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에 1977~1992년 모잠비크 내전 기간 동안 상아 밀렵이 성행하면서 암컷 아프리카 사바나 코끼리의 진화에 영향을 줬다고 밝혔다.

내전 기간 무장군은 무기를 구입하기 위해 코끼리를 포획해 상아를 팔았는데, 이 시기 학살된 코끼리는 개체수의 90%에 달한다고 한다.

연구진은 모잠비크 고롱고사 국립공원에 서식하는 아프리카 사바나 암컷 코끼리가 상아 없이 태어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에 착안해 연구를 시작했다. 연구진은 이 현상이 유전적 요인이나 성별과 관련된 것인지 확인하고자 했다.

프린스턴대 등 연구자들이 고롱고사 국립공원에서 엄니가 없는 코끼리를 마취해 유전자를 얻기 위해 시료를 채취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이들은 암컷 코끼리 중 상아가 있는 7마리, 상아가 없는 11마리의 혈액을 채취해 DNA를 분석했다. 그 결과 포유류의 치아 발달에 기여하는 유전자와 X염색체 한쪽에 돌연변이가 생겨 상아가 사라졌을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다. 암컷은 XX염색체를 갖고 수컷은 XY염색체를 갖는데, 성염색체에 돌연변이가 생긴 암컷 코끼리는 상아를 잃게 된다.

X염색체에 돌연변이가 생긴 어미 코끼리가 수컷을 임신하면 유산 확률이 높아져 상대적으로 상아가 없는 수컷을 발견하기 어렵다는 분석도 나왔다. 암컷을 임신했을 때는 다른 쪽 X염색체가 정상이어서 생존할 수 있지만, 수컷은 X염색체가 하나만 있기 때문에 목숨에 치명적이라는 것이다. 즉 성염색체에 돌연변이가 생긴 어미가 수컷을 임신하면 이미 배 속에서 유산될 가능성이 높아 상아 없는 수컷 코끼리의 모습을 볼 수 없는 셈이다.

연구진은 상아 없는 코끼리의 증가가 식물 종 구성 등의 다른 생태계 속성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상아는 코끼리가 땅속의 먹을 것을 파내고 나무껍질을 벗기는 등 다목적 도구로 쓰이기 때문이다.

미국 생물학자 새뮤얼 와서는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연구 결과에 대해 “자연 선택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수백, 수천년에 걸쳐 일어나는 일을 생각한다”며 “이 극적인 상아 도태가 15년 만에 일어났다는 점은 가장 놀라운 발견 중 하나”라고 말했다.

연구를 이끈 프링글 교수는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자연에서 인간 개입의 영향을 보여주는 것 같다”며 “인간이 말 그대로 동물의 해부 구조를 바꾸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코끼리가 멸종 위기에 처했던 1990년대 이후 코끼리 개체수는 3배 이상 증가했다”면서 “지금과 같은 보존이 유지된다면 상아가 없다는 특성은 감소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노혜진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