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노동자가 이겼다”…팬데믹이 만든 미국 가을파업

입력 2021-10-18 07:59

‘매년 3% 임금 인상’ ‘매일 10시간 휴식’ ‘주말 54시간 휴식’ ‘마틴 루터킹 주니어 탄생일 휴무’ ‘최저소득자를 위한 생활 임금 보장’….

할리우드 노동자들이 제작자 단체와 잠정 타결한 3년 단위 새 임금·단체협약 주요 내용이다. 미국 할리우드 메이저 제작사 단체 모임인 ‘영화·방송 제작자 연합’(AMPTP)은 지난 16일(현지시간) 저녁 노동조합 ‘국제 극장 무대 종사자 연맹’(IATSE)과 이 같은 내용을 합의했다.

제작자들이 노동자 요구 상당 부분을 수용하면서 128년 IATSE 역사 첫 전국 단위 파업은 가까스로 실행되지 않았다.

IATSE 매튜 로브 회장은 “할리우드식 엔딩이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가장 강력한 엔터테인먼트 및 기술 회사들과 맞대결을 펼쳤고, 회원들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합의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AMPTP에는 넷플릭스, 디즈니, 아마존, 애플 등 대형 제작사들이 포함됐다. IATSE는 촬영, 무대, 소품, 메이크업, 의상 등을 담당하는 근로자들로 구성된 단체다. 이번 대결은 글로벌 골리앗을 상대로 한 저임금 노동자들의 투쟁이었던 셈이다.

팬데믹 이후 노동자 우위 시장이 펼쳐지면서 미국 노동운동에 새로운 양상이 펼쳐지고 있다. 파업을 결의하거나 돌입한 사업장이 올해 크게 증가했다. 사용자 측과의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는 노조가 늘면서 노조 가입률도 올라가고 있다. 장기간 지속한 저임금,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한 누적된 불만이 팬데믹으로 인한 노동자 감소와 맞물리며 노동운동이 힘을 얻고 있다.

블룸버그는 17일(현지시간) 자체 데이터베이스 분석결과 지난 8월 이후 전국적으로 약 40개 사업장이 파업에 들어갔다고 보도했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두 배 많다.

코넬대 산업노동관계대학원 추적에 따르면 올해 고용주 178명에 대한 파업이 보고됐다. 미 노동통계국 기록상으로는 12건인데, 이는 1000명 이상의 근로자가 관련한 대규모 작업장 파업만 나타나기 때문에 실상과는 다르다.

농업, 임업, 건설용 중장비 생산업체인 ‘디어’에서는 노동자 1만 명이 지난 14일부터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파업을 시작했다. 1986년 이후 처음이다. 식품제조업체인 켈로그 공장 노동자, 켄터키 주의 버번 양조장 노동자, 매사추세츠와 뉴욕병원 근로자 등도 현재 파업 상태다. 더힐은 미국에서 약 10만 명 가량의 노동자들이 파업 상태거나 파업 결의 중인 것으로 집계했다.

블룸버그는 최근의 노조 움직임에 대해 “노조가 약화해왔던 지난 수십 년 간의 방향성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고 분석했다.

실제 미국에서는 주요 기업들이 노조가 없거나 약한 남부로 이동하며 노동운동이 느슨해졌고, 민간 부문 노조 조직률 역시 급락해 왔다. 지난해 미국 노조가입률은 10.8%(노동통계국 기준)다. 퓨 리서치 센터에 따르면 이는 1954년 34.8%의 3분의 1 수준에도 못 미친다.

그러나 서비스노동자국제연합인 ‘32BJ’ 롭 힐 부대표는 “올해 새로 노조에 가입한 회원들이 지난해 보다 두 배가량 늘어날 것으로 예상한다”며 “임금 보상, 의료보장, 유급 휴가 등에 대한 우려가 노조에 대한 노동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말했다.

변화의 가장 큰 동력은 노동력 부족으로 인한 노동자 우위 시장이다. 경기회복이 시작되면서 수요가 급증해 미국 일자리는 1100만 개에 육박하지만, 노동시장으로 복귀한 인원은 턱없이 부족하다. 지난 9월 신규고용은 19만4000명에 그쳤다. 노동자들의 이직률은 지난 8월 2.9%로 2000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WSJ는 “직장을 그만둬도 다른 일자리를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을 노동자에게 주고 있다”고 분석했다.

노동자들은 팬데믹 이후 급증한 회사 수익이 제대로 공유되지 않고 있다는 불만도 느끼고 있다. 켈로그의 경우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퍼지면서 외식이 줄자 시리얼 소비량이 전년 대비 약 16% 증가했다. 스티븐 카힐레인 켈로그 대표는 지난해만 1167만 달러 상당의 상여금을 받았다.

노동자의 실질임금 인상률은 저조하다. 세인트루이스 연방준비은행에 따르면 지난 9월 미국 근로자들의 시간당 급여는 1년 전보다 4% 증가했지만, 인플레이션은 5.4% 증가했다. 명목임금은 늘었지만, 물가상승을 감안한 실질임금은 줄어든 것이다.

조 바이든 대통령,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 등 친노조 성향 정치인의 지지 발언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최근 디어 노동자들을 향해 “정당한 파업을 했고 더 높은 임금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팬데믹으로 노동자들의 가치관이 달라진 것도 노동시장 변화의 근본적인 요인으로 꼽힌다. 블룸버그는 “팬데믹으로 인해 많은 근로자가 자신의 가치와 우선순위를 다시 생각하게 됐고, 단체 교섭의 주요한 의제가 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워싱턴=전웅빈 특파원 im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