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저녁 부산 해운대구 KNN시어터에서 열린 ‘액터스 하우스’ 행사장에 들어선 배우 한예리가 말했다. 액터스 하우스는 올해 부산국제영화제(BIFF)에 신설된 프로그램이다. 배우가 연기와 삶에 대한 심도깊은 이야기를 관객들과 나누는 자리다. 행사는 백은하 배우연구소 소장의 사회로 진행됐다.
-배우 한예리에게 부산국제영화제의 의미가 남다른 것 같다.
“영화를 처음 시작할 때 친구들과 함께 영화제에 와서 하루종일 영화 보고, 바닷가에서 맥주 한 잔 하는 게 참 좋았다. 제 성장을 잘 지켜봐 주는 영화제라서 영화제가 열린다고 하면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늘 있다. 급히 오더라도 꼭 오고 싶은 마음이다.”
-영화 ‘미나리’로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 다녀왔다.
“사실 TV 보는 느낌이었다. 많은 것들을 하나로 만드는 문화의 힘이 대단한 것 같다. 얼마나 오랫동안 한국 문화가 사랑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안에 제가 속하고 이바지할 수 있어 뜻깊다.”
-‘미나리’에서 연기할 때 기술적 연기로 나올 수 없는 감칠맛이 있었다.
“이모가 여섯 분이고 할머니도 계시다. 집안 행사가 있을 때 솥뚜껑에 장작불 떼면서 집에서 음식을 하는 집에서 살았다. 명절에 모이면 꼭 한 번 싸우고, 나갔다 들어오고 하는 걸 계속 봐서 그런지 연기하는 순간순간 그런 생활의 모습들이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지금은 ‘각자의 이유들이 있었구나’하고 이해도 된다. 대가족이다보면 그 안에 다양한 캐릭터가 있다. 모니카가 남편 제이콥(스티븐 연)과 싸울 때도 어릴 때의 경험을 떠올렸다. 누구나 다 엄마 아빠의 싸움을 본 경험이 있지 않나. 그걸 보면서 불안했던 어릴 때의 기억을 떠올리고 ‘엄마가 어떤 식으로 말했었지? 어떤 표정을 지었지?’ 생각했다.”
-‘미나리’의 결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모니카 입장에서 엔딩이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집에 불이 난 이후 모니카가 가족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제이콥과 더 끈끈해지지 않았을까 한다. 이후에도 둘이 많이 싸웠겠지만 그와 동시에 성장했을 거다.”
-‘목소리가 좋다’는 평가를 많이 받는다.
“목소리가 중저음이어서 어릴 땐 꾀꼬리같은 목소리를 가진 친구들이 부러웠다. 그럼에도 ‘목소리가 중요하겠어?’ 생각하며 살았는데 연기하면서 정서를 표현하는 데 목소리가 중요하다고 느꼈다. 어떻게 하면 내가 가진 목소리 안에서 다양하게 표현해낼 수 있을까 고민한다.”
-남이 가진 걸 부러워하기보다 가진 것 안에서 사용하는 법을 연구하는 편인 것 같다.
“그렇지 않다. 지금 (‘오징어 게임’으로 세계적 인기를 끌고 있는) 호연이가 너무 부럽다.(웃음)”
-연기하면서 무용도 계속 하고 있다. ‘무용하는 한예리’와 ‘배우 한예리’, 두 영역이 어떻게 영향을 주나.
“사실 무용 공연하면서 점점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연습량이 현저히 줄어서 많은 공연을 할 수 없다. 1년에 하나라도 하면 감사한 일이다. 무용은 오랫동안 해오다보니 밥먹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촬영이 끝나면 감정적인 소모가 많아 몸이 무겁고 에너지가 떨어져 있다. 춤을 추면 몸이 회복되고 에너지가 생기고, 우울하지 않게 된다. 소모된 감정이 되살아나는 면이 확실히 있다.”
-풍부한 재능, 유연한 태도, 내면의 단단함을 모두 갖춘 느낌이다. 정원사도 농부도 필요없는 자생적인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어떻게 하면 내가 좋아하는 일을 오래 할 수 있을까 항상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의 편차가 컸다. 열 가지 중에 내가 좋아하는 것 두 가지를 할 수 있다면 싫어하는 것 여덟 가지를 하더라도 버틸 수 있다고 기준을 잡는다. 그 선을 넘으면 내가 도망칠 걸 잘 알고, 그런 상황을 피하기 위한 선택들을 계속 했다.”
-요즘 배우로서 재밌는 건 무엇인가.
“좋아하는 일을 같이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다. 한 곳을 향해 함께 노를 저어간다. 그 결과가 좋고 나쁜 것을 떠나 최선을 다하고 집중하고 있었다는 걸 서로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게 행복하다.”
-요즘 고민은.
“체력적인 한계가 제일 큰 고민이다. 나이를 한 두살 먹다보니 좋아하는 일을 오래하려면 체력이 필요하다는 것, 정신력으로 버티는 일도 체력이 돼야 가능하다는 걸 느끼고 있다. 감독님이 ‘한 테이크 더 가자’고 할 때 ‘더이상 못하겠다’는 말을 안하고 싶다. 이제 ‘체력이 곧 연기력’이 될 것 같다.”
-어떤 배우로 기억되고 싶나.
“매체도 다양하고, 많은 콘텐츠가 쏟아져 나오고 있어서 기억될 만한 작품을 한다는 게 영광인 것 같다. 그런 존재감 가진 사람이 되는 건 쉽지 않다. 어떤 방식으로든 기억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내 욕심으로는 ‘가장 한예리다운 선택으로 계속 연기를 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줬으면 좋겠다. 윤여정 선생님을 보면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 오래도록 지내고 계시다. 나도 누가 봤을 때 ‘저 사람 참 한예리답게 산다’ 그런 얘길 듣고 싶다.”
부산=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