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세상이 너한테 친절하지 않았지. 미안하다. 나라도 너한테 대신 사과해야할 것 같아서.”
탈옥한 죄수 203(최민식)이 남식(박해일)에게 말한다. 전날 뇌종양 선고를 받은 203에게 의사는 “삶이 2주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했다. 남식은 희귀 난치병을 앓고 있지만 약을 구할 돈이 없다. 병원을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약을 훔치다가 덜미를 잡혔다. 그 순간 병원 화장실에서 탈출을 시도하는 203과 마주친다.
숨만 쉬어도 억울한 두 사람이 만났다. 처음엔 둘 다 인생이 꼬였다 싶었다. 내 앞가림도 버거운데 상대방의 손을 잡아주고 싶다. 함께 도망가기 위해 훔친 운구차에서 마침 거액의 돈을 발견한다.
임상수 감독의 유쾌한 로드무비 ‘행복의 나라로’가 이렇게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의 막을 열었다. 주연 배우 최민식, 박해일의 실제같은 연기가 관객의 감정을 쥐락펴락했다. ‘바람난 가족’ ‘하녀’ ‘돈의 맛’ 등 임 감독의 작품에 꾸준히 출연해 온 배우 윤여정이 ‘평창동 윤여사’로 등장해 강렬한 존재감을 뽐냈다. 한대수와 장기하가 부르는 ‘행복의 노래’는 이야기에 진정성을 더했다.
두 남자의 여정은 슬픈 듯 코믹하다. 삶보다는 죽음이 가까워 보이지만 시종일관 따뜻하다. 절망적이기만 했던 두 사람은 서로 의지하며 각자 중요한 것들을 얻는다. 웃음 두 스푼에 눈물 한 스푼을 얹은, 과하지 않은 연출이 마지막을 향해 가는 인간의 모습을 무겁지 않게 그려낸다. 영화는 지난해 제73회 칸 국제영화제 공식 초청작으로 이름을 올린 데 이어 다음 달 열리는 제41회 하와이국제영화제 한국영화 부문에도 초청됐다.
다소 냉소적이고 날카로웠던 전작들에 비해 푸근해진 임 감독의 스타일 변화가 눈에 띈다. 임 감독의 전작과 마찬가지로 ‘행복의 나라로’에도 돈, 죽음이라는 소재가 등장한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 돈의 행방은 중요하지 않다.
6일 오후 부산 영화의전당에서 열린 개막작 기자회견에서 임 감독은 “임상수 영화답지 않게 촌스러워서 좋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나이가 들면서 죽음에 대해 구체적으로 마주하고 생각할 기회가 많아진다”며 “그런 느낌을 갖고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아무리 목표를 세워도 별로 달성되는 것 같지는 않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와중에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따뜻함을 느끼는 게 사는 거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스크린에서 처음 만난 최민식과 박해일의 조합은 나무랄 데 없다. 최민식은 “박해일을 처음 만났을 때 마치 오래 전부터 작품을 함께해온 느낌이었다”며 “촬영장 밖에서 우리 둘 사이에 술병이 많이 쌓인 것 같다”며 웃었다. 박해일은 “언제 한 번 작품에서 뵐 수 있을까 생각한 게 15년이 넘었다”며 “선배님의 호흡 하나하나에도 최대한 리액션을 하려고 노력했다.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윤여정과 이엘을 캐스팅하게 된 배경에 대해 임 감독은 “남자 둘이 나와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이야기라서 연출자 입장에서 균형을 맞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모녀지간으로 나온 윤여정과 이엘은 거액의 자금을 손에 쥔 조직을 움직인다. 두 남자를 쫓는 경찰서장은 배우 최여진이 맡았다. 임 감독은 “203의 딸(이재인) 역시 중요한 인물이다. 딸이라고 해서 아버지한테 배우기보다 마음 씀씀이는 아버지보다 더 크기도 하다”며 “203이 죽기 전에 딸과 나누는 교감도 ‘투 맨 로드무비’에서 균형을 맞추기 위한 노력 중 하나였다”고 설명했다.
임 감독의 이번 영화에는 ‘돈’에 전전긍긍하는 남식의 모습이 나온다. 최근 영화 ‘기생충’과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처럼 한국 사회의 계급, 빈부격차를 부각시키는 콘텐츠가 해외에서 주목받고 있다.
이에 대해 임 감독은 “이 영화는 계층에 관한 영화는 아니다”면서 “계층 문제는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대단히 심각한 문제고, 한국의 작가나 감독들이 이 문제를 대놓고 다루는 배짱이 있어서 주목을 받는 것 같다”는 의견을 밝혔다.
부산=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