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아라비아 등 미국의 비호를 받던 걸프지역 국가들이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 재집권과 미군 철수를 계기로 역내 안보지형의 변화를 실감하고 미국 위주의 동맹관계에 조정을 시도하는 등 대응에 나서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걸프국 고위관계자는 13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 등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미군의 아프간 철수는 40년 넘게 유지됐던 ‘카터 독트린’이 완전히 무너진 것”이라며 “아프간 사태는 충격적인 지진이고 그 여파가 아주 오래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카터 독트린은 1980년 미국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가 선언한 정책으로 석유 수급, 유통로 확보 등 미국의 국익을 위해 필요하다면 군사적인 조치도 불사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 카터 전 대통령은 “페르시아만을 장악하기 위한 어떤 외부 세력의 시도도 미국의 핵심적 이익을 겨냥한 공격으로 간주할 것이며 그런 공격은 군사력을 포함해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격퇴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우디, UAE, 쿠웨이트 등 걸프지역의 석유 생산국들은 카터 독트린 아래 오랜 기간 미국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안보를 보장받았지만, 이같은 안보지형이 변화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미국의 석유 의존도 감소에 대비하면서 이미 외교정책을 실용적인 방향으로 조정해왔던 다수 걸프국들이 이번 아프간 사태를 기점으로 조정 속도를 가속화할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실제로 사우디는 최근 러시아와 방위협약을 체결했고 UAE는 시리아와 외교관계를 회복했다. 중동 패권을 두고 사우디와 경쟁을 벌였던 이란은 지난 정부부터 사우디와 정보협력 차원의 대화를 시작했다. 바레인 역시 이스라엘과 관계정상화를 위해 아브라함 협약을 체결하는 등 역내 새 동맹국을 물색하고 있다.
이같은 변화에는 미국이 아프간처럼 다른 걸프국의 안전을 보장하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가 짙게 깔려 있다. 걸프국 고위관계자는 “우리가 진짜로 미국의 안보 우산에 20년간 더 의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지금 당장 매우 중요한 문제”라며 “(갈등과 반목으로 점철된) 걸프지역이 압력솥 같은 처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설명했다.
미군 철수로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 활기를 되찾았다는 점도 안보지형 변동의 배경으로 꼽힌다. 이 고위관계자는 탈레반의 아프간 재집권과 미군 철수에 대해 “미국이 이슬람을 악용한 테러세력을 겨냥해 20년간 벌인 아프간 전쟁이 아무런 유산 없이 끝났다”며 “중동, 아시아를 넘어 아프리카에서도 극단주의 세력이 영감을 받아 득세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영향력 감소가 중국 등 역내 강국의 영향력 증대로 이어질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이 관계자는 “아프간을 둘러싼 지정학적 투쟁이 있다면 한편에서 파키스탄과 중국, 다른 한편에서 인도, 이란, 러시아가 다투는 걸 보게 될 것”이라며 “미국은 거기에 없을 것 같다”고 진단했다.
정우진 기자 uz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