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현지시간) 오전 8시46분, 미국 전역에 침묵을 알리는 종이 다시 울렸다. 20년 전 세계무역센터(WTC) 쌍둥이 빌딩에 여객기가 처음 충돌했던 시간, 희생자를 기리는 묵념이 시작됐다.
“숫자나 날짜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얼굴로 기억해 달라. 그날은 수많은 사람이 평범함을 뛰어넘는 행동을 보여줬다.”
보스턴에서 출발해 WTC와 충돌한 아메리카항공(AA) 11편 여객기 승무원 사라 로의 아버지 마이크가 뉴욕시 그라운드 제로 추모식 행사장 첫 연사로 나와 말했다.
다른 유족들도 차례로 나와 희생자 2977명의 이름을 낭독하는 행사를 진행했다. 유족들은 가까운 가족을 호명할 땐 슬픔과 그리움의 눈물을 흘렸다. 지난해에는 코로나19 상황이 심각해 미리 녹음한 음성을 틀었다.
조 바이든, 버락 오바마, 빌 클린턴 등 민주당 출신 전·현직 대통령이 그라운드 제로 행사장 앞자리에 나란히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날 추모식은 뉴욕시 그라운드 제로와 워싱턴DC 인근 국방부 청사, 펜실베이니아주 섕크스빌 등 피해현장 외에도 미국 전역 수백 곳에서 일제히 진행됐다. 버지니아주는 알렉산드리아 워터프론트 공원에서 시민 추도식을 열었다. 토요일 오전 이른 시간인데도 수백 명의 인파가 모였다. 건조하고 따뜻한 파란 날씨가 20년 전 그날과 닮았다고 참석자들이 말했다.
이곳에서 만난 제인 트리다는 “소방관이었던 내 친구가 그날 희생당했다. 손자에게 그날의 일을 설명해주려고 함께 왔다”고 말했다. 자신을 교사라고 소개한 마크는 “어렸을 때 벌어진 일이라 경험이 없지만, 9·11 테러는 삶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며 “전쟁 후 첫 기념식이어서 군인들의 희생이 어떤 의미였는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고 말했다.
이날은 아프가니스탄에 미군이 주둔하지 않은 상태에서 열린 첫 추모식이란 점이 특별했다. 전쟁이 끝난 상태에서 처음 맞는 기념일, 주요 연사들은 갈등과 분열을 염려하며 일제히 단결과 화합을 강조했다.
9·11 테러 당시 대통령으로 이라크와 아프간에서 전쟁을 시작한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은 펜실베이니아주 섕크스빌에서 열린 추모식 연사로 나와 “미국이 시험대에 선 비탄의 날에 수백만 국민이 본능적으로 이웃의 손을 잡고 함께 대의를 향해 나아갔다. 테러 이후 놀라운 회복력을 보이며 단합한 국민을 이끌어 자랑스러웠다”고 말했다.
부시 전 대통령은 그러나 “지금은 의견 불일치가 언쟁으로, 언쟁은 충돌로 변하고 있고, 정치는 분노와 공포를 부채질하고 있다”고 우려다. 이어 “국내외 극단주의자들은 인명 경시와 같은 더러운 정신의 산물이고, 이에 맞서는 건 우리의 계속된 의무”라고 말했다.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도 “9·11 이후 우리는 단합이 미국에서 가능하고 중요한 것임을 알게 됐다.”며 “미국은 지난 20년간 보지 못한 새 도전을 마주하고 있고, 우리가 단합돼 있다면 무엇이든 대비돼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크 밀리 합참의장도 국방부 청사에서 “(테러범들은) 우리를 파괴하고 갈라놓으려 했으나 그들의 의도는 실현되지 못했다. 우리는 인내와 단합과 영웅적 행위로 하나가 됐다”고 말했다.
앞서 바이든 대통령도 전날 미리 촬영한 영상을 공개하며 “9·11 테러가 벌어진 이후 우린 곳곳에서 영웅적 행위를 보았고 국가통합의 진정한 의미를 느꼈다. 우리를 우리답게 만들고 미국이 최고에 있게 하는 것이 단결”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추모식에 참석하지 않고, 대신 바이든 대통령에 대한 비판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오전에 1분 45초 분량의 영상 메시지를 내고 “전쟁 20주년은 승리와 영광과 힘의 해여야 했다. 그러나 바이든과 그의 서툰 정부는 패배 속에 항복했다”며 “미국은 무능이 일으킨 망신으로부터 회복하기 위해 몸부림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오후에는 뉴욕 맨해튼의 경찰서와 소방서를 깜짝 방문해 대원들을 격려했는데, 이 자리에서도 바이든 대통령의 아프간 철군을 “엄청난 무능”이라고 비판했다.
그의 불참은 미국 사회가 얼마나 정치적으로 갈라져 있는지를 그대로 드러내는 장면이었다. 9·11 테러 20주기를 맞아 진행된 주요 여론 조사에서도 이런 분열상은 그대로 나타났다.
NBC 뉴스 여론조사에서는 미국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63%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답했다. ‘그렇다’고 한 응답은 29%에 그쳤다. 2001년 9·11 테러 직후 진행한 여론조사에선 72%가 긍정적인 답변을, 11%가 부정적인 답변을 했다. 정확히 반대로 바뀐 것이다.
양당 정치에 대한 실망감도 컸다. 2001년 12월 NBC 여론조사에서 민주당과 공화당은 긍정평가가 각각 48%, 56%로 부정평가(각 23%, 22%)를 두 배 이상 앞섰다. 그러나 올해 여론조사에서 민주당과 공화당 긍정 평가는 각 39%, 32%로 부정평가(41%, 46%)보다 낮았다.
CNN이 전날 발표한 여론조사에선 ‘미국이 잘 되고 있다’는 응답이 31%에 불과했고, ‘그렇지 않다’는 응답은 69%나 됐다. 2001년 12월 조사에선 거꾸로 ‘잘 되고 있다’는 응답이 64%, ‘그렇지 않다’는 답은 34%였다. 이번 조사에서 미국인 74%는 현재의 미국의 상황에 화가 난다고 답했다.
AP 통신 여론조사에선 미국인 88%가 크게 갈라져 있다고 답했다. 미국인은 단결되어 있고 가장 중요한 가치에 대해 동의한다고 답한 사람은 11%에 불과했다.
NBC는 “이라크와 아프간 전쟁 이후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했고, 치명적인 전염병 이후 마스크와 백신과 같은 문제로 미국인들이 분열됐다”고 평가했다.
워싱턴=전웅빈 특파원 im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