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 전 특별검사, 서울남부지검 이모 부장검사(부부장검사로 강등), 포항 남부경찰서장 배모 총경, 이동훈 조선일보 전 논설위원, 주호영 국민의힘 의원, 박지원 국정원장 등. 가짜 수산업자 김모(43·구속기소)씨로부터 금품을 제공받은 것으로 드러난 정관계 유력 인사들의 명단이다.
이번 사건은 본래 김씨의 투자사기 혐의에 대한 조사에서 시작됐다. 경찰은 선동오징어(선상에서 급랭한 오징어) 사업으로 3~4배의 수익을 벌게 해주겠다며 100억원대 투자금을 끌어모은 혐의로 김씨를 지난 2월부터 수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검찰로 송치되기 직전, 김씨의 입에서 유력 인사들의 이름이 갑자기 줄줄이 흘러나왔다. 김씨의 진술을 토대로 경찰은 유력 인사들에 대한 청탁금지법 위반으로 수사 범위를 확대했다. 그러나 김씨는 돌연 입을 닫아버렸다. 경찰이 구치소에까지 찾아가 추가 진술을 받아내려고 했지만 김씨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김씨는 왜 갑자기 유력 인사들에게 금품을 제공했다고 진술했다가, 돌연 입을 닫았을까. 최초 진술 경위 두고 경찰과 김씨 측은 서로 전혀 다른 설명을 내놓고 있다. 김씨는 경찰이 무리하게 수사했다고 주장하고, 경찰은 김씨가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고 설명한다. 김씨로부터 금품 제공 사실을 알게 된 베테랑 형사는 추가 수사를 진행하던 과정에서 부적절한 행위를 한 게 드러나 업무에서 배제당했다. 결국 5개월에 걸친 경찰 수사는 청탁금지법을 일부 적용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유력 인사들에게 보내진 선물의 대가성은 하나도 입증해내지 못했다. 이 때문에 수산업자 김씨가 벌인 정관계 의혹의 실체는 제대로 규명되지 못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수산업자 김씨 “경찰이 ‘여자친구 만나게 해준다’며 불렀다”
김씨 사건을 맡고 있는 이모 변호사는 지난 9일 발표된 경찰 조사 결과에 대해서 “김씨의 진술이 있었다면 왜 조서가 작성되지 않은 것이냐”면서 “김씨는 금품 제공 사실은 언급한 적이 없다고 한다. 구두 진술이 있었다는 것은 경찰의 주장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이어 “김씨는 경찰이 유도 질문을 해서 억울하다는 입장”이라며 “유도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일부 설명한 사실을 가지고 마치 경찰에 진술한 것처럼 얘기하고 있다”고 주장했다.이 변호사는 지난 7월에도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경찰이 김씨에게 ‘여자친구를 만나게 해주겠다’고 해 부른 자리에서 (금품 수수) 정황들을 두고 압박했다”며 “김씨가 진술한 부분이 없고 경찰 조서에도 남기지 못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경찰의 정반대 설명 “수산업자가 먼저 면담을 요청했다”
반면 경찰은 유치장에 있던 김씨가 검찰 송치 전날 먼저 경찰과의 면담을 강하게 요청했다고 정반대의 설명을 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이미 김씨는 송치가 예정된 상태였다. 굳이 재조사할 필요도 없었고, 실제로 조사 일정도 없었다. 그런데 유치장에 있던 김씨가 형사를 특정해 ‘말하고 싶은게 있다. 꼭 진술하고 싶다’고 강력하게 면담을 요구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진술을 하고 싶다고 했지만, 조서 작성은 원치 않는다고 했다”고도 덧붙였다.실제 김씨의 이날 진술은 조서에 기재돼있지 않다. 대신 경찰은 ‘수사보고’에는 관련 내용을 기재했다고 한다. 김씨가 갑자기 진술을 멈춘 이유에 대해서는 경찰도 설득력 있는 설명을 내놓지는 못하고 있다. 경찰은 지난 9일 브리핑을 통해 “진술 동기는 김씨만 알 수 있는 부분이고, 이후 진술 거부에 대해서는 확인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수산업자의 ‘작전 변경’?
경찰의 설명대로 수산업자 김씨가 진술과 태도를 갑작스럽게 바꾼 것이라면, 김씨가 자신의 사기 혐의 수사 관련 상황을 유리하게 가져가기 위해 경찰에 정보를 일부러 흘렸을 가능성도 있다. 자신의 사기 혐의에 대한 조사에서 선처를 기대하며 경찰에게 정관계 유력 인사들의 금품 수수 정황을 전달하는 식이다.또는 유력 인사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거꾸로 경찰의 수사 상황을 압박하려는 의도를 가졌을 수도 있다. 김씨는 평소 유력 정치인들과의 친분 관계도 주변에 강조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력 인사들을 자신의 구명 운동에 이용하기 위해 일부러 수사기관에 이름을 노출했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김씨는 구속 수감 중에 “상황이 어렵지만 꿋꿋하게 잘 지내고 있다. 버틸 수 있게 힘을 달라”며 자신이 금품을 제공했던 유력 인사들에게 편지도 보냈던 것으로 전해졌다.
김씨의 진술에도 불구하고 예정대로 검찰에 송치되자, 갑작스럽게 진술을 멈췄을 가능성도 있다. 한 경찰 관계자는 “김씨가 금품 관련 진술을 한 뒤에, 변호사와 상의하면서 입장이 갑자기 바뀐 게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재판을 앞두고 별다른 실익이 없다는 판단이 나왔을 것이란 얘기다.
최초 진술받았던 A형사는 과잉수사로 업무배제
경찰은 수산업자 김씨가 형사를 특정해 면담을 요청했다고 설명했는데, 김씨가 지목한 형사는 바로 강력범죄수사대 내에서도 베테랑으로 통하는 A형사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사건 수사 과정에서 A형사는 이모 부장검사의 금품 수수 혐의와 관련해 검사의 사무실을 압수수색하는 등 강도 높은 수사를 주도적으로 벌여온 인물이다.하지만 A형사는 지난 7월 수산업자 김씨의 부하 직원에게 “김씨의 변호사를 만나 그가 하는 말을 녹음해 오라”고 요구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면서 담당 수사에서 배제 조치됐다. 서울변호사회는 “경찰관이 수사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피의자의 부하직원에게 피의자와 변호인 간 대화 내용을 녹음하도록 강요한 것은 명백히 헌법을 위반하여 국민의 신체적 자유를 침해한 행위”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A형사의 이 같은 행위도 결국 김씨의 진술을 추가로 이끌어내기 위한 행위에서 벌어진 것으로 보인다. 김씨로부터 유력 인사들에게 금품을 제공했다는 범죄 첩보를 최초로 입수해 수사를 확대했는데, 김씨가 추가적인 진술을 거부하자 김씨를 압박하기 위해 무리한 행동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수산업자의 ‘입’에서 시작돼 ‘입’에서 막힌 경찰 수사
수산업자의 입에서 시작된 수사는 결국 수산업자가 입을 닫으면서 사실상 중단됐다. 이 때문에 경찰도 수산업자 김씨의 진술을 정확히 공개하지는 못하고 있다. 10일에는 김씨가 “대구·경북(TK) 지역 전직 국회의원 2명에게 각각 5000만원씩을 건넸다”고 경찰에 진술했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지만 경찰은 “확인해드리기 어렵다”며 김씨의 진술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경찰 입장에서도 김씨가 추가 진술을 거부하면서 조사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경찰은 지난 9일 금품 공여자인 수산업자 김씨와 김씨로부터 금품을 제공받은 혐의(청탁금지법 위반)로 박 전 특검, 이모 검사, 언론인 4명 등 총 7명을 검찰에 송치했다. 언론인 4명은 앞서 알려진 대로 이동훈 전 조선일보 논설위원, 엄성섭 전 TV조선 앵커, 이모 중앙일보 논설위원, 정모 TV조선 기자다.
배 총경과 주호영 의원 등이 받은 금품은 ‘1회 100만원 또는 1년에 300만원’인 청탁금지법 위반 기준에 미치지 못했다는 게 경찰의 결론이다. 벤츠 차량을 무상 제공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된 김무성 전 의원에 대해서는 입건 전 조사를 이어갈 계획이다. 수사 상황에 따라 김 전 의원도 입건될 가능성이 남아있다.
김판 박장군 기자 p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