父 간호 위해 청원휴가 냈다가 따돌림…해군 일병 극단선택

입력 2021-09-07 13:56 수정 2021-09-10 09:31

군인권센터가 해군 강감찬함에서 선임병 등으로부터 구타와 폭언, 집단 따돌림을 겪은 정모 일병이 휴가 중 자택에서 극단적 선택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7일 밝혔다. 센터에 따르면 주요 수사 대상자들은 인사조치 없이 청해부대 임무 수행을 위해 출항해 소환 조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정모 일병은 지난해 11월 어학병으로 해군에 입대해 2월 1일 강감찬함에 배속됐다. 같은 달 11일 정 일병은 아버지 간호를 위해 25일까지 2주간 청원휴가를 받았다. 복귀 후에는 코로나19로 인한 예방적 격리 지침에 따라 3월 9일까지 격리됐다.

선임병들은 돌아온 정 일병을 곱게 보지 않았다고 한다. “꿀을 빨고 있네” “신의 자식이다”라는 말을 하며 대놓고 정 일병을 따돌렸다. 정 일병이 승조원실(내무실)에 들어오면 다른 병사들이 우르르 나가버리기도 했다고 한다.

3월 16일 근무 중 실수를 한 정 일병에게 선임병들은 가슴과 머리를 밀쳐 갑판에 넘어뜨리기도 했다. 정 일병이 일어나자 이들은 다시 밀쳐서 넘어뜨렸다. 정 일병이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묻자 이들은 “뒤져버려라”라고 대답했다.
부산 남구 해군작전기지에서 출항을 앞둔 청해부대 30진 강감찬함이 정박해 있다. 연합

정 일병은 당일 밤 함장에게 카카오톡으로 선임병들의 폭행, 폭언을 신고하고 비밀 유지를 요청했다. 함장은 정 일병의 보직을 갑판병에서 CPO 당번병으로 변경했다. 보직이 바뀌었지만 계속해서 함 내에서 가해자들과 마주쳐야 했다.

과거 공황장애 약을 복용했던 정 일병은 당시 상황이 견디기 힘들어 다시 약 처방이 필요하다고 요청했다. 병영생활상담관과 면담을 하기도 했다.

폭행이 있은 지 열흘 뒤인 3월 26일 정 일병은 자해시도를 했다. 함장은 27일 새벽 1시쯤 정 일병에게 가해자들을 불러 사과받는 자리를 갖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하며 가해자들을 불러 대화를 하게 했다.

이후 정 일병은 입대 전에는 보이지 않던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구토, 과호흡 등 공황장애 증상이 나타났다. 해군으로 복무하면 6개월간 배를 타야 하는 규정이 있고, 중도에 하선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행정 절차 등이 뒤따른다.

함장은 4월 6일이 되어서야 정 일병을 하선시켜 민간병원에 위탁 진료를 보냈고, 정 일병은 정신과에 입원했다. 정 일병이 배에서 내린 뒤인 4월 8일, 강감찬함은 징계위원회가 아닌 ‘군기지도위원회’에 가해자들을 회부했다. 군기지도위원회는 군기훈련이나 벌점 등을 부여하는 곳이다.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이 7일 오전 서울 마포구 군인권센터에서 해군 강감찬함 소속 일병 사망 사건과 관련한 기자회견문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

이후 6월 8일 병원에서 퇴원한 정 일병은 퇴원 후 7월 2일까지 휴가를 받았다. 가족들은 당시 정 일병이 눈에 띄게 살이 빠져있었고, 살갑던 예전 모습과는 달리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기조차 어려워 했다고 기억했다. 가족과 친구들에게도 스스로 낙오자가 되었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러다 6월 18일 아침, 정 일병은 자택에서 극단적 선택을 했다.

군인권센터는 “해군 3함대는 함 내 관계자들의 신상을 확보하기는커녕, 정 일병 사망으로부터 열흘이 지난 6월 27일 함장, 부장 등을 인사조치 없이 그대로 청해부대로 보내버렸다. 이로 인해 함장, 부장 등 주요 수사 대상자들은 아직도 제대로 된 조사를 받지 않았다”고 해군 대응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구타, 폭언, 집단 따돌림 등을 겪었던 정 일병의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것은 명백한 군의 책임”이라며 “해군은 즉시 정 일병을 죽음으로 몰고 간 가해자들의 신상을 확보하고 강감찬함 함장, 부장 등을 소환해 수사하라. 지지부진한 수사 역시 해군본부 검찰단으로 이첩해 진행해야 할 것”이라고 요구했다.

해군은 “현재 사망 원인과 유가족이 제기한 병영 부조리 등에 대해 군 수사기관에서 수사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심희정 기자 simcit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