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남겨두고 한밤 철군한 미국…“도덕적 재앙”

입력 2021-08-31 10:17 수정 2021-08-31 10:35

미국이 30일(현지시간) 아프가니스탄 철군을 위한 마지막 비행기를 띄웠다. 군 최고 사령관인 조 바이든 대통령은 “이제 20년간의 미군 주둔이 끝났다”는 성명을 발표하며 전쟁 종식을 공식 선언했다.

미국은 그러나 아프간 탈출을 원하는 자국민 수백 명을 전장에 남겨두고 한밤중 철군했다. 승리를 축하하는 총포를 쏘고 미군이 남긴 장비를 장악한 뒤 ‘완전한 독립’을 선언한 탈레반 모습과 극명히 대비됐다.

이날 철군은 미군과 아프간 민간인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낸 테러 발생 닷새 만이다. 최장기 해외 전쟁이 피비린내 가득한 부끄러운 ‘후퇴’로 막을 내리면서 바이든 대통령은 최악의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다.

국가적으로도 미국은 이번 철군 과정에서 보여준 혼란으로 국제사회에서 리더십 타격을 입었다. 로이터통신은 “(아프간에 개입했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동맹국 역시 촉박한 퇴각을 강요당했다”며 “철군 자격이 있는 아프간 조력자 수천 명을 그대로 남겨뒀다”고 지적했다.

철군 시한 하루 남기고 한밤 퇴각
케네스 프랭크 맥킨지 미 중부사령관은 “아프간 철수의 완료와 미국 시민, 제3국인, 아프간 현지인의 대피 임무 종료를 선언하기 위해 섰다”며 “철수를 위한 군사적 작전과 2001년 9월 11일 이후 아프간에서 시작된 군사 임무가 모두 끝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철군은 자국민 대피가 완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한밤중 떠날 정도로 급박하게 이뤄졌다. 로스 윌슨 주아프간 미국 대사를 실은 마지막 C-17 수송기는 카불 시각 30일 오후 11시 59분 공항을 출발했다고 로이터 통신은 전했다. 애초 정했던 시한보다 앞당겼다.

매켄지 사령관은 “가슴 아픈 일이 많다. 우리가 빼내고 싶었던 모든 이들을 빼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미처 대피시키지 못한 자국민이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는 다만 “열흘 더 머물렀더라도 실망한 사람이 있었을 것”이라며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미군은 공항 외곽에서 통행을 통제해 왔던 탈레반 측에도 철군 시점을 알리지 않았다고 했다.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은 아프간에 남아 있는 미국인에 대해 “200명은 안 되고 100명에 가깝다”며 “탈출을 원하는 이들의 지원을 위해 끈질기게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철수 후 성명에서 “탈레반이 아프간을 떠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세계가 지켜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날 철군이 종료된 것에 대해 “합동참모본부를 비롯한 모든 사령관의 만장일치 권고였다”며 “군의 생명을 보호하고 민간인의 탈출 가능성을 확보하는 최선의 방법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아프간 주둔을 연장하지 않기로 한 결정에 대해 31일 대국민 연설을 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더힐은 “바이든 대통령은 이달 초 철군 종료 시한을 연장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을 때 ‘모든 미국인을 대피시키겠다’고 약속했다”며 비난이 나올 것이라고 지적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사설에서 “도덕적 재앙”이라고 비판했다.

환호하는 탈레반
미군 철수가 끝난 후 카불 곳곳에선 축하 총성이 울렸다. 탈레반이 전쟁 승리를 축하하며 하늘로 향해 총을 쏘는 장면은 SNS로 실시간 전파됐다.

카리 유수프 탈레반 대변인은 “마지막 미군 병사가 카불 공항을 떠났고, 우리는 완전한 독립을 얻었다”고 말했다. 자비훌라 무자히드 대변인도 SNS에 “카불에서 들리는 총소리는 미군 철수에 대한 기쁨의 탄식”이라며 “마지막 미군 점령자가 철수했다”고 썼다.

미국과 탈레반의 극명한 대비는 전쟁의 패배를 더 뼈아프게 드러내고 있다. 미국 내부에선 아프간 전쟁의 계기가 된 9·11 참사가 ‘탈레반의 승리’ ‘미국의 패배’로 결론 났다는 비난이 제기되고 있다. 케빈 매카시 하원 원내대표는 전날 “대통령이 약속한 ‘검증된 리더십’이 아니다. 9·11 기념일을 앞두고 서둘러 행동하기로 한 정치적 결정의 결과로 군이 사망했다”고 말했다.

CNN은 “아프간 철수에 따른 정치적 비난이 커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AP통신은 “미국이 최장기 전쟁을 끝냈지만 군 역사에서 ‘엄청난 실패’ ‘완수하지 못한 약속’ ‘광란의 마지막 탈출’로 기억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미국은 철군 과정에서 보여준 혼란으로 국제사회의 비판도 받고 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 동맹국 사이에선 노골적인 불만이 터져 나왔다. 유럽 내부에선 미국 의존적인 동맹 전략의 전면 수정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인권과 민주주의 동맹 재건을 모토로 내세웠던 조 바이든 행정부로서는 아프간에 자행되는 여성과 아동 인권침해의 책임 역시 떠안게 됐다.

워싱턴=전웅빈 특파원 im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