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그동안 국내에서 다양한 예술 장르의 소재로 다뤄졌다. 하지만 오페라 장르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 대규모 제작비가 투입되는 오페라의 특성상 다른 장르에 비해 창작의 수가 절대적으로 적을 뿐만 아니라 지자체의 제작비 지원과 맞물려 지역의 문화유산이나 위인을 소재로 만드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5.18 광주를 소재로 한 첫 창작오페라인 ‘무등둥둥’ 역시 광주에서 만들어졌다.
1999년 초연된 김선철 작곡 ‘무등둥둥’은 계엄군의 총격에 사망한 만삭 임산부의 실제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시인 조태일과 김준태가 대본을 쓴 이 작품은 시인 8명이 쓴 5.18 광주 소재 시(詩)들을 아리아로 활용했다. 광주에서 활동하는 민간오페라단인 빛소리오페라단이 1999년 광주문예회관에서 초연한 뒤 2002년 서울 국립극장에서도 선보인 바 있다. 이후 ‘무등둥둥’은 광주의 또 다른 민간오페라단인 강숙자오페라라인에서도 여러 차례 공연되는 등 광주에서는 꾸준히 명맥을 이어왔다.
광주시립오페라단이 5.18 광주 민주화 운동 40주년을 기념해 제작한 ‘박하사탕’은 ‘무등둥둥’에 이어 5.18 광주를 소재로 한 두 번째 창작오페라다. 음악이 작품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총체극이나 음악극 형태로 5.18 광주를 다룬 사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오페라로 규정하진 않았다. 2019년 3월부터 제작에 돌입한 ‘박하사탕’은 그 해 12월 쇼케이스를 가진 뒤 지난해 12월 온라인에서 콘서트 오페라로 선보였다. 그리고 지난 27~28일 서울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첫 정식 초연을 올렸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다룬 두 번째 창작오페라
‘박하사탕’은 이번 공연을 앞두고 어떤 창작오페라 초연보다 기대와 관심을 모았다. 완성도 높은 영화의 무대화라는 점과 함께 한국 현대음악계와 연극계를 대표하는 작곡가 이건용과 극작가 겸 연출가 조광화로 대표되는 창작진 덕분이다.
오페라 ‘박하사탕’은 세계적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은 이창동 감독의 동명 영화(2000년 개봉)를 원작으로 했다. 순수했던 청년 영호가 첫사랑 순임을 좋아하게 되는 1979년부터 20년 뒤 모든 것을 잃고 피폐해져 자살하는 1999년까지 20년간의 이야기를 담았다. 달려오는 기차 앞에서 “나 돌아갈래”를 외치는 주인공의 모습이 강렬한 영화는 이야기가 결말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독특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래서 영화 앞부분에서 인간말종 같았던 영호가 뒤로 갈수록 순수했던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5.18 광주 당시 진압군으로 동원됐던 영호는 실수로 여고생을 쏴 죽인 뒤 운동권 학생을 고문하는 경찰이 되는 등 타락했다. 영화는 당시 도청 등 5.18 광주의 현장을 직접 보여주지 않으면서도 5.18 광주가 개인의 삶에 얼마나 깊은 상흔을 남겼는지 묵직한 메시지를 던진다.
한국 창작오페라는 최근 몇 년 사이 바뀌긴 했지만 오랫동안 ‘초연이 곧 종연’일 정도로 완성도 낮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근본 원인이 설득력 없는 대본에 이있었다. 특히 지자체 지원에 의지하다 보니 지역의 위인이나 문화유산을 소재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비해 해외 오페라계에서는 현대 오페라의 낯선 음악 기법을 관객들이 어려워하는 만큼 스토리는 검증되고 친숙한 것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영화나 영화화됐던 소설을 오페라로 만드는 것이 트렌드가 됐을 정도다.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웨딩’,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브레이킹 더 웨이브’, 루이스 부뉴엘 감독의 ‘절멸의 천사’, 마이클 래드포드 감독의 ‘일 포스티노’ 등 일일이 꼽을 수 없을 정도. 미국에서는 영화로 더 유명한 스티븐 킹의 추리소설 ‘돌로레스 클레이본’ ‘샤이닝’이 오페라로 만들어졌다. 오페라에 앞서 뮤지컬 장르에서는 이미 영화의 무대화가 붐을 이룬지 오래됐다.
도청 앞 시위와 공동체 장면을 새롭게 만들어
영화 ‘박하사탕’의 각색을 맡은 조광화는 그동안 연극과 뮤지컬을 오가며 활동한 데다 지난 2010년 창작오페라 ‘연서’의 대본을 쓰기도 했다. 특히 그는 영화 원작의 뮤지컬 ‘서편제’ ‘소리도둑’ 등의 대본을 맡아 각색 경험이 많다. 오페라 ‘박하사탕’에서 그는 영화의 거슬러 올라가는 구조는 따르되 주인공 영호 중심의 서사에 주변 인물들의 존재감을 키우고 각각의 관계성을 만들었다. 오롯이 영호의 기억과 시선으로 진행되는 영화와 달리 한정된 무대와 출연진을 가진 오페라는 영호에게 모든 스토리가 집중되어선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에서 존재감 없던 군대 상사나 선배 형사는 영호의 상대역인 강현기로 뭉뚱그려져 나온다. 체제와 조직에 충실한 강현기는 5.18 광주에서도 시민에 대한 총격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며 형사가 돼서도 승승장구한다. 영호의 아내와 재혼한 그는 영호와 달리 가족을 살뜰히 보살핀다.
주변 인물들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인물은 영호에게 고문을 당하는 운동권 학생이다. 원작에서 남학생 박명식이 영화에서 여학생 박명숙으로 성별이 바뀐 것 외에 영호를 5.18 광주와 직접 연결하는 등 비중이 커졌다. 여고 간호반 소속인 명숙은 시민군을 돕다가 오발로 다친 영호를 치료하게 된다. 또한 영호가 실수로 시민을 죽이는 것도 목격한다. 수년 뒤 시위하다 끌려온 명숙을 고문하면서 영호의 정신은 더욱 자학적이 된다.
또한 오페라가 원작과 다른 점으로 망월동 묘지, 도청 앞 시위와 시민 공동체를 새롭게 넣은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건용과 조광화 모두 도청 앞 장면이 이번 오페라에서 중요하다고 밝힌 바 있는데,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영호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역사로 그려내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연출을 겸한 조광화는 매우 사실적인 영화와 달리 상여와 망자들을 통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오가고 있다.
이건용이 작곡한 음악의 경우 여러 인물과 상황의 주제 동기가 반복적이고 효과적으로 사용된다. 특히 첫사랑 순임과 운동권 학생 명숙의 ‘순수함’ ‘아름다움’을 의미하는 주제선율과 영호가 타락해가는 장면에 나오는 ‘폭력’의 주제선율이 강렬하게 대비된다. 여기에 김민기 작곡 ‘아침이슬’, 이건용 작곡 ‘그렇지요’ 등 민중가요가 사용돼 작품의 메시지를 더욱 묵직하게 전달한다. 이건용은 창작오페라와 관련해 음악과 우리말의 자연스러운 조화를 중시해 왔는데, 이번 작품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작곡가 이건용, 창작오페라 발전에 주춧돌
작곡가 이건용은 수많은 음악적 업적을 남겼지만 창작오페라와 관련해서 한 획을 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내에서 가장 자주 공연되는 창작오페라 ‘봄봄’의 대본을 직접 쓰고 작곡했으며, 서울시오페라단장 시절인 2012년 창작오페라 개발을 위해 국내 중견 극작가 및 작곡가들과 함께 ‘세종 카메라타’를 결성했기 때문이다. 세종 카메라타에서 2013년 리딩공연을 거쳐 이듬해 초연된 고연옥 작, 최우정 작곡 ‘달이 물로 걸어오듯’은 완성도 높은 창작오페라로 호평을 한몸에 받았다. 2017년까지 운영된 세종 카메라타를 통해 결성된 예술가 콤비들은 이후 또 다른 수작 창작오페라를 만들어냈다. 대표적인 것이 배삼식 작, 최우정 작곡 ‘1945’와 윤미현 작, 나실인 작곡 ‘빨간 바지’ ‘춘향탈옥’이다.
창작오페라 ‘박하사탕’은 그동안 준비작업에 공을 들인 만큼 초연의 완성도가 높았다. 성악가와 합창단, 오케스트라 모두 밀도 있는 연주를 보여줬다. 하지만 아쉬움은 남는다. 무엇보다 광주를 전면에 지나치게 부각함으로써 주인공인 영호의 캐릭터가 원작 같은 무게감과 강렬함을 주지 못한다. 즉 5.18 광주에서 희생자만이 아니라 가해자의 영혼까지 파괴됐다는 주제의식이 오페라에서는 희미해진 것이다.
지난해 콘서트 오페라에선 2부7장이었던 ‘박하사탕’은 이번 초연에선 2부6장으로 압축됐다. 그런데도 1시간 반이 조금 넘는 1부는 지루하게 느껴진다. 특히 1부2장 망월동 묘역에서 일일이 묘비를 소개하는 장면은 5.18 광주와 관련해 너무나 익숙한 클리셰인데다 지나치게 길어서 압축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약간의 군더더기에도 불구하고 ‘박하사탕’은 국내에서 처음 시도된 영화의 오페라화 무대로서 큰 발자국을 남겼다. 무엇보다 전국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완성도 높은 대형 창작오페라 레퍼토리를 새로 하나 남기게 됐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