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서 26일(현지시간) 발생한 연쇄 폭탄 테러가 탈레반과 이슬람국가(IS) 등 이슬람 무장조직 간 정면충돌을 예고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루스 폴러드 블룸버그 오피니언 담당 편집장은 27일 ‘탈레반과 지하디스트(이슬람 성전주의자) 라이벌들 간에 다가오는 대학살’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카불공항에서 벌어진 민간인 공격은 더한 유혈충돌의 전조가 될 수 있다”고 해설했다. 카불공항 테러는 IS 지지자들을 비롯해 이슬람 극단주의자를 자극하는 불씨가 될 수 있다는 판단이다.
AP통신은 전날 저녁 카불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 외곽에서 2차례 자살폭탄 공격으로 아프간 민간인 최소 60명이 숨지고 143명이 다쳤다고 전했다. 몇 시간 뒤 CBS방송은 사망자가 90명대로 늘었다고 보도했다.
케네스 맥켄지 미 중부사령관은 미군 12명이 사망하고 15명이 부상했다고 발표했다. 미군 사망자도 이후 1명 더 늘었다. 아프간에서 미군이 사망하기는 지난해 2월 이후 처음이다. 사망자 수로는 최근 10년 사이 가장 많다.
사건 직후 IS 아프간 지부격인 IS-호라산(IS-K)은 배후를 자처하며 “미군과 미국에 협력한 아프간인을 표적으로 삼았다”고 밝혔다.
미국은 “탈레반이 결탁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며 IS-K 단독 범행으로 판단했다. 탈레반은 곧장 테러 규탄 성명을 발표하며 선을 그었다. 이들은 카불공항 테러를 ‘끔찍한 사건’이라고 묘사하며 “반드시 범인을 추적해 재판에 회부하겠다”고 밝혔다.
자비훌라 무자히드 탈레반 대변인은 트위터를 통해 “미군이 치안을 책임지는 지역에서 발생한 카불 공항 민간인 폭탄 테러를 강력히 규탄한다”며 “우리는 자국민의 안전과 보호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강조했다.
IS-K는 이탈한 파키스탄 탈레반 대원들이 2015년 아프간 동부에 만든 조직이다. 현재 병력은 1500~2000명으로 추정된다. 미국과 아프간이 공급해 다수 지도자를 제거하기 전 최대 규모였던 2016년의 절반 수준이라고 뉴욕타임스(NYT)는 설명했다.
이들은 탈레반에 비해 규모가 압도적으로 작지만 올해 아프간에서 민간인, 정부 관계자, 탈레반을 대상으로 수십 차례 공격을 자행했을 정도로 활동적이다. 특히 올해 공세 수위를 크게 높였다. 카불공항 테러 발생에 앞서 미국과 영국은 IS-K가 공격해올 가능성을 경고했다.
NYT는 “이런 위협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이달 31일까지 아프간에서 모든 미군을 철수하기로 한 시한을 지키기로 결정한 요인으로 보인다”고 짐작했다. 바이든은 지난 24일 연설에서 “철군은 빨리 끝낼수록 좋다”며 “우리가 아프간에 오래 머물수록 IS-K의 공격에 따른 위험이 커진다”고 말했다.
IS-K는 탈레반을 적으로 간주하며 수년 동안 충돌을 거듭해왔다. 탈레반이 아프간을 장악했을 때 축하성명을 낸 알카에다 등과 달리 IS-K는 반감을 드러냈다. 워싱턴 소재 글로벌정책센터 일원인 지하디스트 전문가 아이멘 자우드 타미미는 자신의 블로그에 “IS는 탈레반의 행동이 정복이 아니라 미국과 협력한 인수라고 주장해왔다”고 설명했다.
아프간 통치에 집중하는 탈레반과 달리 IS-K는 이슬람 종교 지도자가 통치하는 ‘칼리파 체제’ 수립을 목표로 전 세계에 이슬람 국가를 세우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이들은 불만을 품은 탈레반 대원과 다른 무장단체 조직원을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 중이다. 일부 전문가는 탈레반 대열에서 이탈한 대원들이 합류하면서 IS가 경험 많은 전투원을 확보했다고 진단한다.
유엔은 지난 6월 보고서에서 중앙아시아, 러시아 북캅카스, 파키스탄, 중국 서부 신장 지역에서 지하디스트 8000~1만명이 미군 철수 몇 달 전 아프간으로 쏟아져 들어왔다고 전했다. 지하디스트 대부분은 탈레반이나 알카에다와 긴밀한 협력 관계인 이들로 판단됐다.
NYT는 “하지만 일부는 IS-K와 동맹을 맺고 탈레반이 약속한 안정과 안보에 중대한 도전을 제기하고 있다”며 “테러 전문가들은 아프간의 IS가 서방을 상대로 대규모 공격을 감행할 능력이 있는지 의심하지만 다수는 IS가 세계 더 많은 지역에서 알카에다보다 위험하다고 말한다”고 강조했다.
요르단 암만의 정치사회연구소 소속 이슬람운동전문가 하산 아부 하니에는 NYT에 “이라크와 시리아,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IS가 더 큰 위협이라는 것은 분명하다”며 “IS가 더 널리 퍼져 있고 새로운 세대에 더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유엔 집계로 올해 첫 4개월 동안 아프간에서 IS-K가 직접 벌이거나 지원한 공격은 77건이다. 표적은 소수 민족인 시아파 무슬림과 여성, 산부인과 병동을 비롯한 민간 기반시설과 군인이었다.
폴러드 편집장은 “이 두 집단(IS-K와 탈레반)이 전투를 벌이게 되면 언제나처럼 주요 희생자는 민간인이 될 것”이라고 상기시켰다. 그는 “그들(민간인)은 1996년부터 2001년까지 탈레반의 잔혹한 통치에 고통받았고 이어 미군과 나토군의 공습을 겪었다”며 “그러고는 자살공격의 부활이 뒤따랐다”고 덧붙였다.
미국 브라운대학 조사 결과 아프간에서 분쟁으로 숨진 민간인은 4만7000명이 넘었다. 올해 상반기에만 약 1700명이 숨졌다. 군인과 경찰은 6만6000명 사망했다. NYT는 “탈레반의 번개 같은 아프간 장악은 그곳의 모든 무장 세력이 그들의 통제 아래 있다는 것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IS-K의 본류인 IS는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알카에다의 한 분파로 출발했다. 이라크와 시리아 다수 지역에 이슬람 신정국가를 세운 이들은 전성기 때 영국에 맞먹는 수준까지 규모를 확장했다.
NYT는 “미국과 그 동맹이 주요 영토를 폭격하자 IS는 다른 나라로 뻗어나갔다”며 “IS의 역사는 테러리스트 네트워크를 차단하고 억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IS 연계 조직은 2019년 3월 시리아에서 마지막 영토를 잃은 뒤 서아프리카, 중앙아프리카, 시나이반도, 남아시아 등지에서 여전히 활동 중이다. IS-K가 그중 하나다.
IS는 신병 모집과 자금 조달을 놓고 알카에다와 경쟁하며 아프간, 시리아 등지에서 직접 싸워왔다. 미국이 군대를 철수하고 탈레반이 통제력을 높이는 과정에서 아프간은 IS와 알카에다의 주요 전장이 될 수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탈레반은 지난해 트럼프 행정부와 합의하며 알카에다가 미국을 공격하기 위해 아프간 영토를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서약했다. NYT는 “탈레반이 그 약속을 얼마나 긴밀하게 존중할 것인지, 그리고 그들이 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미해결 문제로 남아 있다”며 “IS는 그런 제약이 없기 때문에 미군 철수 기한인 8월 31일을 기점으로 미국 지원을 받는 정부에서 탈레반(정권)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의 혼란을 악용하는 데 더 유리할 수 있다”고 봤다.
탈레반이 전처럼 엄격한 이슬람 규율을 강요하지 않겠다고 밝혔지만 조직 내 강경파가 IS로 이탈할 것을 우려해 온건 정책만을 고수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진단도 있다.
아부 하니에는 탈레반의 결집력이 좀처럼 단단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며 “지도부의 온건화 조치로 강경파가 IS로 넘어갈 수 있다. 이는 탈레반에 큰 도전으로 급진파를 없애고 싶어도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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