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희상 “文정부 민생 미흡… 차기는 통합 능력 갖춰야”

입력 2021-08-25 13:38 수정 2021-08-25 17:41
문희상 전 국회의장은 두 시간 남짓한 인터뷰에서 선공후사(先公後私) 무신불립(無信不立)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정치철학과 국익을 우선하는 실용 외교, 가까이에서 본 대통령들에 대해 거침없이 이야기했다. 진영을 떠나 노태우 대통령의 협치와 북방외교를 높이 평가했고,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을 상대로 배짱외교를 펼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기에 당시 한국이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같은 처지가 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권현구 기자

“한국 정치의 가장 큰 고질병 중 하나가 동지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 편가르기예요. 시작은 기득권자였던 보수 쪽이었다고 보는데, 어느 날 이쪽이 또 기득권이 돼서 편견의 늪에 갇혀 있단 말이야. 지난 4·7 재보궐선거가 양쪽으로 나뉘어 치른 예비전이었다면 이번 대선은 그보다 더 큰 대회전이 될 거예요.”

문희상(76) 전 국회의장의 이력을 소개하는 건 새삼스럽다. 김대중 대통령 때 초대 정무수석, 노무현 대통령 때 초대 대통령 비서실장과 당 대표를 지냈다. 대통령을 제외한 당과 청와대, 국회의 요직을 모두 경험한 여권의 대표적 원로 정치인으로, 지난해 국회의장 퇴임과 함께 정계에서 은퇴했다. 200일도 채 남지 않은 20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만난 그는 대통령에게 필요한 자질로 국민통합과 국가경영 능력을 꼽았다. 문재인정부의 국정 운영 방식에 아쉬움을 표하면서도 “나의 이기심”이라며 정권 재창출에 대한 기대를 감추지 않았다.

-정치가에게 필요한 자질로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열정 균형감각 책임감을 꼽았고, 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는 협상력과 평화 의지라고 했다. 차기 대통령에게는 어떤 능력이 필요하다고 보나.

“첫째 국민통합이다. 하나가 되지 못하는 나라에 무슨 미래가 있겠나. 두 번째는 국가 경영 능력이다. 대통령이 국가 경영을 아주 잘해서 100점을 받았는데, 국민이 세대별 지역별로 쪼개져 통합 부문에서 0점을 맞았다고 하자. 나는 대통령의 점수는 더하기나 나누기가 아니라 곱셈이라고 생각한다. 곱하기 0이 되면 전부 0점이 된다. 국민통합을 못하면 모든 업적이 무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정치의 영원한 목표는 통합이다. 역대 대통령이 모두 이 점에서 실패했다.”

-국민통합에 대해서는 문재인 대통령도 조국 사태 이후로 높은 점수를 받기 어려울 텐데.

“조국이 안타까워 건지려다가는 대통령까지 함께 빠지게 된다고 임명 철회를 건의했었다. 민주적 절차는 100점짜리 후보가 없어도 그중 제일 나은 한 명을 고르는 것이다. 그렇게 뽑은 대통령이 일을 못한다면, 대통령의 수준이 결국 국민의 수준이다. 그런데 대통령이 터무니없다면 뒤집을 수 있는 게 또 국민이다. 국민이 역사를 바꾸는 걸 직접 세 번 봤다. 4‧19혁명과 6‧10항쟁, 그리고 촛불혁명이다. 촛불혁명을 완성할 책무는 일차적으로 국민이 뽑은 문재인 정권에 있다. 대통령이 그걸 완수하지 못했다면 역사적 소명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여당에서 잇는 게 순리라고 본다.”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10년 집권 주기론’을 언급하며 내년 대선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고 했다. 민주당의 정권 재창출이 가능하다고 보는가.

“돼야 한다는 희망 사항이다. 당으로서는 김대중과 노무현, 문재인정부 3기에 걸쳐 씨앗을 뿌리고 키운 것을 이어갈 제4기 대통령이 탄생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정권 재창출을 위한 야당과의 접전을 앞두고 내부에서 서로 싸우면 무슨 소득이 있겠나. 소탐대실이고, 쥐 잡으려다 독만 깨고 있다. 나는 그걸 지적했다.”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의 이른바 ‘명낙대전’에 대해 “못난 정치”라고 일갈한 것 말씀인가. 두 후보는 네거티브 공방에 비해 이렇다 할 정책 대결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여야 모두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난파선에서 싸워 이겨서 선장이 되면 뭘 하겠나.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은 무리가 있다. 기본소득을 놓고 논쟁이 붙은 건 아주 바람직하다. 나는 이재명의 기본소득론에 찬성하지 않는데, 어느 날 차근차근 추진해보겠다며 ‘점진적으로’라는 표현을 붙였다.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 건 성남시장과 경기지사 때 실험해봤고 평판이 쌓였기 때문에 자신 있다는 거다. 이런 게 이 지사의 강점이다. 직설적이고 자유분방하게 말하는 점은 불안하지만.”

-지사직을 유지하는 것에 대한 논란이 있다.

“나라면 그만 둔다. 하지만 법적으로 대선 90일 전에 사퇴하면 된다. 지사직을 유지하는 게 유리하다는 전략적 판단인데 뭐라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들 중에 오랜 인연 때문에 의장님이 이낙연 전 대표 손을 들어줄 것이라는 예상이 있다. ‘겉은 장비 속은 조조’라는 의장님 별명을 이 전 대표가 붙인 거라고도 하던데.

“나도 그 양반이 말단 기자일 때 ‘스타일리스트’라는 별명을 지어줬다. 글을 쓰던 사람이라 말도 아름답게 잘한다. 정치인에게는 큰 장점이다. 또 완벽주의자이고. 인연으로 말하면 정세균 전 총리와도 깊다. 정 전 총리가 쌍용그룹 상무를 그만두고 정치에 입문해 공천을 받을 때 내가 역할을 했다. 합리적이고 정확한 생각, 거짓말하지 않는 것, 그런 의미에서 정 전 총리도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의장님이 킹 메이커 역할을 하지 않겠느냐는 보도도 있었다.

“날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얘기다. 경선 후보가 대통령 후보가 되는 순간, 단일 후보가 돼서 뒷배 좀 봐달라고 한다면 그때는 다르다. 그건 개인 아무개가 대통령이 되고 안 되고의 싸움이 아니라 민주개혁 정부를 계승하는 대표로서의 책임이 있는 선거이기 때문이다.”

-문재인정부 인사들이 야당에서 대선에 도전하는 것은 어떻게 평가하나.

“임기가 보장된 검찰총장과 감사원장 직책을 박차고 나온 두 사람은 자신들을 임명한 대통령을 향해 비난만 하고 있다. 그건 도덕에 관한 문제다. 임명됐으면 최선을 다하고, 문제가 있다면 다른 정치적 과정을 밟아야 했다. 정치인으로 변신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다. 미래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할 시간과 노력이 있어야 하는데 정부가 하는 일에 반대하는 것 외에 비전을 내놓지 못하고 있지 않나.”

-대선 경선 과정에서 여야 모두 네거티브와 폭로전, 난타전이 이어지면서 정치의 하향 평준화라는 지적이 나온다.

“그것이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그걸 깨달으면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한탄할 것 없다. 최종 판단은 주권자인 국민이 하는 것이고, 국민이 할 탓이다.”

-촛불혁명의 완성을 위해 재집권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무엇이 촛불혁명의 완성인가.

“대통령이 왕처럼 군림했기 때문에 비선 실세의 국정농단이 있지 않았나. 개헌을 통해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을 없애는 게 촛불정신의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정치가 사생결단식이 된 뿌리에도 승자가 시골 면서기까지 다 가져가는 승자 독식이라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가 있다. 대통령의 권력을 총리에게 떼어주면 서로 윈윈할 수 있다. 내각책임제는 국민이 불신한다. 나는 대통령의 권한을 반으로 나누는 분권형을 주장한다.”

-진흙탕 싸움을 불사하며 승리한 당선자가 권력을 내놓을까.

“여당 경선 후보 중에는 개헌을 하고 대통령 임기를 1년 줄이겠다는 분이 있다. 김대중 대통령 때는 통일외교안보국방은 대통령이 맡고, 나머지 경제사회문화를 김종필 총리에게 줬다. 대통령이 할 마음만 있으면 헌법을 고치지 않아도 가능한 일이다. 노무현 대통령도 박근혜 야당 총재에게 총리직을 제안하고 권력을 나누겠다고 했다. 그 심부름을 내가 했으니 잘 안다. 그런데 개헌을 반대하면서 ‘참 나쁜 대통령’이라는 말로 민심을 확 잡았다.”

-지난해 국회의장 퇴임 기자회견에서 전직 대통령 사면을 제기했는데, 이제 문 대통령 임기 내 사면은 어려워진 것 아닌가.

“통합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는 대통령이라면 가장 가성비 높은 선택이 전직 대통령 사면이다. 이런 해법이 가능하다. 김대중 대통령은 당선자 시절 김영삼 대통령에게 통합 차원에서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을 사면해달라고 주장했고 그게 이뤄졌다. 지금도 그럴 수 있다. 사면을 해도 하지 않아도 반발이 있을 테니 대통령과 당선자가 책임을 나눠 갖는 것이다.”

문희상 전 국회의장이 지난 18일 서울 종로구 동아시아문화센터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권현구 기자

-차기 대통령의 시대적 책무는 무엇인가.

“공정과 정의라는 시대정신을 구현하고 미래를 위한 구체적인 혁신을 해야 한다. 세계사의 흐름과 국제 정세를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은 곤란하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 테크놀로지를 위해 얼마나 투자하고 어떤 노력을 기울일 것인지, 높아진 국격에 맞게 한국이 기후변화와 기아 문제 해결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지 비전을 제시하고 그에 따른 정책과 전략을 설명해 국민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대통령 하겠다고 나온 사람들이 남의 부인이 옛날에 어땠다고 하니, 아유, 이게 뭔지 모르겠다.”

-역대 대통령의 리더십을 ‘머리형’ ‘배짱형’ ‘가슴형’으로 평가했다. 이상적인 대통령은 어느 형에 가까운가.

“세 가지를 다 갖췄다면 가장 좋을 텐데, 드물다. 말하자면 김영삼 대통령은 용장, 용감한 장수다. 전광석화처럼 개혁을 추진한 결단력과 용기가 그의 리더십의 근본이다. 가슴형은 노무현과 문재인 대통령이다. 노무현은 가슴이 뜨거웠고 문재인은 가슴이 따뜻한 공감형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만 가지 문제에 만 가지 답이 있는 머리형이다. 균형감각과 정책 능력, 국가 경영능력, 미래 예측 능력, 통찰력을 고루 갖춘 대통령이었다.”

-임기 말에도 40%를 오르내리는 문 대통령의 높은 지지율은 이례적이다. 대통령의 인기는 정권 재창출에 유리한 요소 아닌가.

“대통령 지지율이 높아도 민주당 재집권보다 정권 교체를 희망하는 비율이 훨씬 높다. 여당은 현재 상황을 위기로 봐야 한다. 지지율은 앞으로 몇 번이나 들쭉날쭉할지 모른다. 그래서 유리하다고 말하기 어렵고, 대통령의 지지율에 기대려는 건 바보짓이다.”

-이전에는 모든 대통령이 레임덕 상태에 있었고, 여당 후보자는 대통령에게 맞서거나 차별화를 시도하면서 유권자들에게 어필하는 전략을 택했다. 이번 선거에서는 다른 구도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경선이 끝나면 차별화가 불가피할 것이다. 다만 현 상황에는 독특한 측면이 있다. 문재인정부가 촛불혁명을 계승한 첫 번째 주자고, 후보자는 그것을 이어받아야 할 촛불혁명 2기 주자다. 1번 주자에 대해 비판하거나 차별화를 꾀하면 두 번째 주자로서의 생명력을 잃을 수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2년 12월 대선 후보 시절 선거운동을 위해 대전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문희상 전 국회의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국민일보DB

-문 대통령은 남은 임기 동안 어떤 일을 해야 할까.

“문재인정부는 임기 동안 촛불혁명을 완성하지 못했고 오히려 반대하는 여론이 많이 높아졌다. 지금은 다음 주자에게 배턴 터치를 할 생각을 해야 한다. 재주를 부리거나 쇼를 해서는 안 된다. 그걸 가르쳐준 게 지난 4·7 재보궐선거다. 스스로 촛불정신을 왜곡시켰던 가장 큰 대목은 민생 문제에 무능하다는 것이었다. 또 내로남불과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두 가지를 해야 한다. 하나는 백신 수급을 비롯한 코로나19 대책을 100% 재검토해서 완벽하게 정비해야 한다는 것, 또 하나는 부동산 문제를 최선을 다해 해결하고 책임질 사람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 외에는 정권 재창출을 할 뾰족한 방법이 없다.”

-내년 대선은 득표율 5%P 이내에서 승부가 갈릴 초박빙 경쟁이 될 것이라는 예상이 많다. 벌써부터 후유증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선거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불복하면 민주주의 자체가 흔들리고, 그것이 더 무서운 결과를 낳는다는 걸 국민이 잘 알고 있다. 다만 사회가 두 쪽으로 갈라져 있는 상황이 오래되면 국력이 저하된다. 지금 국제 정세는 우리가 젖먹던 힘까지 합쳐도 모자랄 상황이다.”

-‘성공한 대통령은 단 한 명도 없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어떤 대통령이 성공한 대통령이라고 보는가.
“대통령이 청와대를 떠나는 날 국민들이 박수치면서 ‘고생 많으셨어요, 편안히 지내세요’, 이렇게 보내주는 대통령이다. 그게 가장 아름다운 퇴장이다. 감옥에 가지 않고 불행하게 자살하지 않는 대통령이 왜 없겠나. 그런 대통령이 앞으로 나올 것이라 생각한다.”

권혜숙 인터뷰 전문기자 hskw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