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발생한 성폭력 사건에 대해 뒤늦게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한 경우 피해자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진단을 받은 시점부터 소멸시효가 시작된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3부(주심 노정희 대법관)는 19일 ‘체육계 미투 1호’로 알려진 전직 테니스 선수 김은희씨가 코치였던 A씨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1억원을 배상하라고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김씨는 초등학생이던 2001년 7월부터 2002년 8월까지 당시 테니스 코치였던 A씨에게 수차례에 걸쳐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 이후 성인이 된 김씨는 2016년 5월 한 테니스 대회에서 A씨와 마주친 뒤 과거 피해 사실을 떠올렸고, 두통과 위장장애 불안 등의 증세에 시달리다 병원에서 PTSD 진단을 받았다. 김씨는 2017년 7월 다른 동료들의 증언 등을 확보해 A씨를 형사 고소했고, A씨는 2018년 7월 대법원에서 징역 10년을 확정받았다. 김씨는 이를 토대로 1억원의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추가로 제기했다.
재판에서는 불법행위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권의 소멸시효가 쟁점이 됐다. 민법상 손해배상 청구권 소멸시효는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부터 3년 또는 ‘불법 행위를 한 날’부터 10년이기 때문이다. A씨는 재판 과정에 범행이 발생한 지 이미 10년이 지나 김씨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소멸됐다고 주장했지만 하급심 재판부는 김씨에게 1억원을 배상하라고 판단했다. 하급심은 “김씨가 PTSD의 원인이 A씨의 성범죄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사건 청구 2년 전인 2016년 7월에야 비로소 알게 됐다”며 “2016년 7월을 불법행위로 인한 소멸시효의 기산점으로 산정해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법원도 원심 판단을 유지했다. 대법원은 “성범죄로 인한 PTSD가 뒤늦게 나타나는 등 예측하기 어려울 수 있다”며 “성범죄 당시나 일부 증상의 발생일을 일률적으로 손해가 현실화된 시점으로 보게 되면 장래 손해가 발생한 시점에서는 소멸시효가 완성돼 손해배상을 청구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했다. 다만 법원은 전문가 판단이 있기 전에 PTSD로 인한 손해가 현실화됐다고 인정하는 데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부연했다.
허경구 기자 ni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