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 이슬람 무장단체 탈레반이 진입해오던 지난 16일(현지시간), 카불 공항은 도시를 탈출하려던 시민들로 전시 상황과 다를 것이 없었다. 공항 곳곳에서는 총성이 들렸고, 헬기가 공항 주변을 맴돌며 통제에 나서기도 했다. 주아프간 대사관 직원들은 우방국 군용기에 탑승하기 위해 활주로를 달리다가 공습경보가 울려 대합실로 대피하는 등 급박한 상황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대사관 직원들은 위험한 고비를 넘어 마지막까지 현지에 남아 있던 교민과 함께 우방국 군 수송기를 타고 무사히 카불을 빠져나왔다.
최태호 주아프간 대사는 18일 “흔히 영화에서나 보던 모습이었다”며 탈출 당시 긴박한 상황을 전했다. 평상복 차림으로 화상 간담회에 나선 최 대사는 “최대한 급히 필수물품만 챙겨 나와야 해 양복도 챙기지 못했다”고 말문을 열었다.
외교부 본부와 주아프간 대사관은 지난 15일 아프간 상황이 급변함에 따라 정의용 장관 주재로 긴급 화상회의를 하고 있었다. 두 시간 넘게 진행된 회의 도중 최 대사는 우방국으로부터 메시지를 받고 사태 심각성을 깨달았다.
최 대사는 “우방국에서 ‘빨리 공관들은 대사관을 떠나 카불공항으로 이동하라’는 메시지가 왔다”며 “평소 친분이 있던 대사들과도 연락이 닿지 않자 급한 상황이라고 판단해 장관과 상의해 철수를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외교부는 급변 사태를 대비해 평소 미국 등 우방국 대사관들과 수시로 정보를 공유하고 있었다.
대사관 직원들은 비밀문서 파기 등 대사관 폐쇄에 필요한 작업을 서둘러 마치고 공항으로 이동했다. 차를 타고 우방국 대사관으로 이동한 뒤 카불 군 공항까지는 헬기를 이용했다. 피난민 행렬로 육로 이동 수단은 사실상 막혀 있었다. 카불 시내에선 탈레반이 탱크를 동원해 검문소를 설치하고 스마트폰과 신분증 확인 등을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마지막까지 현지에 남아 있던 교민은 카불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자영업자였다. 대사관 직원들은 잔류 의지를 보였던 그를 수차례에 걸쳐 설득했다. 결국 철수를 결심한 교민과 대사관 직원들은 16일 탈출하려 했지만 주민들이 대거 몰려 공항이 마비됐다.
이들은 미군이 이튿날 군중을 밀어낸 다음에야 항공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최 대사는 “마치 옛날 배를 타듯 수송기 바닥에 오밀조밀 모여 앉았다”며 “탑승자 대부분은 미국인, 제3국인, 아프간인도 일부 있었다”고 전했다. 그는 주카타르 대사관에서 주아프간 대사관 업무를 이어갈 계획이다.
김성훈 기자 hunh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