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프로배구 대한항공은 지난해 통합우승(정규리그 1위·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이룬 뒤 이탈리아 출신 로베르토 산틸리(56) 감독과 재계약하지 않고 생소한 핀란드 출신 토미 틸리카이넨(34) 감독을 새로 선임했다. 고참 선수인 한선수보다도 어린 나이의 감독이지만, 세계의 각기 다른 선진 배구를 대한항공에 적용시키기 위함이었다.
틸리카이넨 감독 아래서 대한항공의 배구는 눈에 띄게 빨라진 모습이다. 세계 배구의 흐름인 ‘스피드 배구’가 대한항공의 국가대표급 선수들에 의해 차츰 구현되는 중이다. 17일 경기도 의정부체육관에서 열린 2021 의정부·도드람컵 프로배구대회 남자부 B조 조별리그 2차전 KB손해보험과의 경기(대한항공 3대 0 승)에서도 대한항공의 빠른 배구가 빛을 발했다.
대한항공 선수들은 이날 세터가 토스하는 시점에 이미 3~4명의 공격수들이 공격 준비를 완료한 상태였다. 측면과 중앙, 후위까지 골고루 활용되는 공격 루트에서 선수들이 발에 부스터를 달고 재빠르게 움직이니 상대팀으로선 미리 예측하고 대응하기 힘들어보였다. 임동혁이 “작년에는 스텝을 ‘원 투 쓰리’ 다 밟고 때렸다면 요즘은 거의 원 스텝으로 때린다”고 설명할 정도. 선수들은 심지어 세리머니조차 빠르게 뛰어다니며 했다.
‘쉬운 배구’는 스피드를 더 가속시키기 위한 방법이다. 강공만이 능사가 아니라 쉽게 득점을 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대한항공 공격진들이 상대 수비진이 갖춰지기 이전에 ‘덩크슛’ 같은 모션으로 푸싱 공격을 자주 시도하는 이유다. 빠르게 이뤄지는 푸싱 공격은 공격 속도가 떨어지는 연타와는 다른 개념이다. 임동혁은 “연타는 (코트) 가운데 감아서 넣는 거라면, 저희가 시도하는 건 찔러 넣는 거라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
‘휘바(Hyva·‘좋아’란 뜻으로 핀란드인들이 가진 긍정과 기쁨의 정서를 나타냄)의 나라’ 핀란드 출신 감독답게 틸리카이넨 감독은 항상 웃는 얼굴이다. 임동혁이 “산틸리 감독이 불이라면, 틸리카이넨 감독은 물 같다”고 표현할 정도로, 틸리카이넨 감독은 무표정했던 산틸리 감독과 정반대다.
그저 물렁할 거란 생각은 오산이다. 훈련 강도는 틸리카이넨 감독이 더 높다고 한다. 유광우는 “적은 운동량이 아니다. 웃으면서 안 되는 걸 계속 시키는 느낌이라 안 할 수도 없이 계속 하게 된다”며 “칭찬에도 인색하지 않아 선수들이 흥이 나 훈련, 경기에 임한다”고 혀를 내둘렀다. 맛있는 당근을 끊임없이 공급하는 와중에 풀스윙으로 채찍을 휘두르는 셈이다.
그럼에도 선수들은 새로운 배구를 즐기고 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해내고 싶은 배구를 한다는 게 경기 내내 표정에서 드러났다. 공격을 놓치면 코트 바닥에 드러누워 한숨을 쉬었고, 플레이가 정확히 들어맞았을 땐 너나 할 것 없이 ‘찐 행복’ 표정으로 환호성을 질러댔다. 임동혁은 “공이 너무 빨라 처음엔 ‘할 수 있을까’ 생각이 들었는데 감독님이 물음표가 떠오르면 빨리 들어가서 맞든 안 맞든 일단 때려보라 하셨다. 경기력으로 나오듯 괜찮은 것 같고 새로운 배구를 배우는 것 같다”고 만족감을 드러냈다.
템포가 워낙 빠르니 상대 감독들도 대응에 애를 먹는다. 후인정 KB손보 감독은 “국내에선 보기 드물게 플레이를 빠르게 가져가 선수들이 적응을 잘 못해 어려운 시합 했다”고 맞대결 소감을 밝혔다. 대한항공과 치열한 우승 경쟁을 펼칠 우리카드의 신영철 감독도 “대한항공은 유광우, 한선수 등 세터들이 충분한 능력을 갖고 있어 감독이 제시한 (스피드 배구란) 미션을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것 같다”고 언급했다.
틸리카이넨 감독은 속내를 잘 알 수 없는 미소를 띤 채 “우리가 추구하는 배구는 보는 사람이 호기심을 가질 수 있는 ‘호기심 배구’다. 경기 승패보다 선수들이 코트에서 새로운 걸 보여줬다는 게 더 기쁘다”면서도 “블로킹은 물론 상대팀 연타와 페인트를 수비하는 부분은 아직 더 보완해야 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의정부=이동환 기자 hu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