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무장조직 탈레반이 장악한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과 동맹국들의 철수 행렬이 이어지고 있지만 중국과 러시아는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미국 CNN방송은 15일(현지시간) “탈레반에 대한 중국의 자신감은 아프간 수도 카불에서 드러난다”고 지적했다. 탈레반은 아프간 주요 도시를 빠른 속도로 점령해가던 지난달 러시아와 중국을 차례로 방문했었다.
카불 주재 중국 대사관은 이날 성명에서 “중국인과 중국 기업에 대한 보호를 아프간에 있는 여러 당사자들에게 요청했다”며 “지금까지 중국인 부상이나 인명 피해에 관한 어떠한 보고도 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러시아도 탈레반이 카불에 있는 외국 공관에 대한 안전보장을 약속했다며 현지에서 철수할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드미트리 쥐르노프 아프간 주재 러시아 대사는 이날 자국 방송에 나와 “현재까지 러시아 대사관에 직접적인 위협은 없다”며 정상적으로 업무를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중국과 러시아가 느긋한 모습을 보이는 데는 탈레반과의 사전 접촉이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탈레반의 대외 창구인 카타르 도하 주재 정치사무소 대표들은 지난달 초 러시아 모스크바를, 탈레반 2인자 물라 압둘 가니 바라다르가 이끄는 대표단은 지난달 말 중국 톈진을 각각 방문했다. 아프간에서 미군 철수가 본격화되면서 탈레반이 세력을 급속도로 확장하던 시점이다. 중국 외교부가 탈레반 대표단의 방중 사실을 공개한 건 탈레반 정부를 인정하고 상대할 용의가 있다는 메시지였다고 CNN은 분석했다.
탈레반이 아프간을 완전히 장악하자 중국에선 기다렸다는 듯 ‘일대일로’ 추진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아프간 재건 과정에 중국이 계속해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중국과 아프간은 2016년 시진핑 국가주석의 역점 사업인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관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당시 중국 화물 열차가 2000만달러(약 233억원)에 달하는 물품을 싣고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을 거쳐 아프간 북부 항구도시 하라탄에 도착한 사실이 크게 보도됐다. 중국은 신실크로드 구상의 전략적 요충지이지만 안보상 이유로 비껴나 있던 아프간을 일대일로 사업의 주요 파트너로 끌어들이려는 노력을 지속해왔다.
판광 상하이 사회과학원 전문가는 16일 중국 관영 글로벌타임스에 “중국은 사태 확산을 막기 위해 파키스탄, 타지키스탄 등 다른 국가들과 국경 통제를 위한 대테러 협력을 시작했다”며 “중국이 할 수 있는 것은 전후 복구에 참여하고 미래 발전을 위해 투자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프간에 상당한 투자를 해온 중국으로선 탈레반의 복귀가 기회라기보단 안보 위협이라는 지적도 제기된다. 중국은 신장위구르자치구를 근거지로 하는 무슬림 단체가 위구르족의 분리·독립을 부추길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바라다르가 지난달 톈진에서 왕이 중국 외교부장을 만났을 때 “아프간의 어떠한 세력도 아프간 영토에서 중국에 해를 끼치는 일을 하도록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한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
워싱턴에 있는 독일마셜기금의 앤드류 스몰 연구원은 한 인터뷰에서 “중국 정부는 아프간 정권에 대해선 실용적이었지만 탈레반의 이념에 대해선 불편해 했다”며 “아프간 탈레반의 성공이 파키스탄 탈레반을 포함한 이 지역의 전투력을 고무시키는 상황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 역시 같은 고민을 안고 있다. 탈레반 집권에 따른 정세 불안이 중앙아시아를 넘어 러시아 안보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베이징=권지혜 특파원 jh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