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속도’ 줄행랑 아프간 대통령 “유혈사태 피하려…”

입력 2021-08-16 05:00 수정 2021-08-16 10:15
연합뉴스

탈레반의 공세로 수도 카불까지 함락 직전으로 몰리자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평화적으로 정권을 넘기겠다며 사실상 항복을 선언했다. 사임설이 도는 아슈라프 가니 아프간 대통령은 현지를 떠난 것으로 전해진 가운데 “유혈사태를 피하기 위해 이런 결정을 내렸다”는 입장을 밝혔다.

가니 대통령은 현지시각으로 15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이슬람 무장조직 탈레반은 (수도) 카불을 공격해 나를 타도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며 “학살을 막기 위해 떠나기로 했다”고 썼다. 가니 대통령은 만약 자신이 아프간에 머물러 있었다면 수없이 많은 애국자가 순국하고 카불이 망가졌을 것이라면서 이같이 설명했다.

그는 이어 “이제 탈레반에게 아프간 국민의 명예와 보전에 대한 책임이 있다”며 탈레반의 승리를 시인하면서도 “아직 국민의 마을을 얻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또 “역사상 폭력에 의존하는 누구도 정당성을 부여받지 못했다”며 “이제 그들(탈레반)은 새로운 역사적 도전을 맞이하게 될 것이며, 아프간의 이름과 명예를 지키지 않으면 다른 세력에 우선권을 넘기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가니 대통령은 탈레반이 카불에 입성한 직후 국외로 도피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현지 언론과 외신은 정부 고위 관리들을 인용해 가니 대통령이 타지키스탄으로 향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뉴욕타임스(NYT)는 탈레반과 협상을 위해 카타르 도하에 간 익명의 아프간 정부 대표단 관리를 인용해 가니 대통령이 부인과 2명의 측근을 데리고 우즈베키스탄행 비행기에 탑승했다고 전했다.

앞서 같은 날 아프간 내무부 장관은 “탈레반에 평화롭게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밝혔다고 AFP통신이 보도했다. 아프간 정부 관계자도 AP통신을 통해 “탈레반 협상단이 권력 인수 준비를 위해 대통령궁으로 이동 중”이라며 이 협상의 목표는 탈레반에 평화롭게 정부를 넘기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탈레반 대변인은 이날 “며칠 안에 정권이 이양되길 바란다”고 밝혔다고 AFP통신은 전했다.

아랍에미리트(UAE) 언론 알아라비야는 익명의 취재원을 인용해 가니 대통령의 하야가 임박했다면서 알리 아마드 자랄리 전 내무장관이 새 과도정부의 수반으로 내정됐다고 보도했다. 수도 카불 외의 대도시를 모두 장악한 탈레반은 이날 카불 외곽 진입을 시작했다.

탈레반 대변인은 트위터를 통해 조직원들에게 카불 관문에서 대기하고 입성하진 말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그는 대신 아프간 정부가 평화적으로 항복하는 방안으로 두고 탈레반과 아프간 정부가 협상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아프간 정부나 군에서 일한 모든 이가 용서받을 것이며 누구에게도 복수할 계획이 없다”며 “아프간인들은 두려움에 도망치지 말고 아프간에 남아 달라”고 당부했다.

탈레반은 이날 향후 아프간 내 외국인과 각종 시설 운영에 관한 원칙을 밝혔다. 탈레반은 카불 내 외국인은 원할 경우 떠나거나 새 탈레반 정부에 등록해야 한다고 발표했고 공항과 병원은 계속 운영될 것이며 긴급 물품 공급 역시 중단하지 않겠다고 설명했다. 탈레반은 또 아프간 병사들에게 귀향을 허용할 것이라며 군대의 해산을 지시했다.

함락 직전에 놓인 카불의 아프간 시민들은 패닉에 빠졌다. 외신에 따르면 카불의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엔 해외로 탈출하려는 인파가 몰려 북새통을 이뤘고 현지 항공사의 국제선 항공편은 이미 다음 주까지 예약이 꽉 찼다. 정부가 붕괴 위기에 처하자 달러 사재기가 심화하고 앞다퉈 현금을 인출하는 모습도 관찰됐다.

카불에 대사관을 두고 있는 주요국들은 자국민 철수를 시작했다. 미국은 카불 주재 대사관 철수를 시작했고 조 바이든 대통령은 이를 지원하기 위해 미군 5000명을 배치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14일 성명을 통해 “미국 요원과 동맹국 요원의 질서 있고 안전한 감축 그리고 우리 군을 도왔던 아프간인들의 질서 있고 안전한 탈출을 보장하기 위해 약 5000명의 미군 배치를 승인했다”고 밝혔다. 대사관 경비를 위해 1000명, 하미르 카르자이 공항 경비를 위해 3000명에 이어 1000명의 병력을 추가 배치하기로 한 것이다.

독일, 영국도 최소한의 인력만 남긴 채 속속 철수시키고 있다. 우리 정부도 한국 대사관 인력 대피 및 철수 가능성을 열어두고 대책을 논의 중이다. 카불 함락 등 사태가 급박해질 경우 유관국과 협조해 대사관을 철수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외교부 당국자는 “현지 우리 대사관은 아직 인원이 체류 중이며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천금주 기자 juju79@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