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간 대통령 ‘빛의 속도’ 줄행랑…초고속 정권 붕괴

입력 2021-08-15 22:17 수정 2021-08-16 13:37
이슬람 무장조직 탈레반 대원들이 15일(현지시간) 아프가니스탄 동부 라그만주의 한 도로에서 차량 위에 앉거나 서 있다. AFP연합뉴스

아프가니스탄이 20년 만에 다시 탈레반 손에 넘어갔다. 미군이 철수를 선언한 지 불과 3개월 만이다. 아프간 정부는 탈레반이 수도 카불에 진입하자마자 백기를 들었다. 정부의 부패와 무능이 탈레반 정권으로의 회귀를 자초한 것으로 평가된다. 탈레반은 국제사회 시선을 의식한 듯 공개적으로 평화적 권력 이양과 여성 인권 보장을 강조하는 등 과거와 사뭇 다른 태도를 보였다.

압둘 사타르 미르자크왈 아프간 내무장관은 15일(현지시간) 녹음된 연설을 통해 “과도 정부에 평화적으로 권력을 이양할 것”이라고 발표했다고 AFP통신이 전했다.

탈레반 협상가들이 정권 이양을 논의하기 위해 대통령궁으로 들어갔다는 보도가 나온 지 한 시간도 안 돼 공식 발표가 나온 것이다. 이날 카불에 진입해 외곽 3개 지역을 장악한 탈레반은 “카불을 무력으로 점령할 계획은 없다”며 아프간 정부에 항복을 요구했다.

아슈라프 가니 아프간 대통령은 곧바로 사의를 표한 뒤 측근들과 인접국 타지키스탄으로 도피한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보안상 이유로 가니의 동선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탈레반은 가니의 행방을 확인 중이라고 언론에 설명했다.

압둘라 압둘라 아프간 국가화해위원회 의장은 온라인 영상을 통해 “그(가니 대통령)는 힘든 시기에 아프간을 떠났다”며 “신이 그에게 책임을 묻는다”고 말했다. 압둘라 의장은 권력 포기를 거부해온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을 비판해온 인물이다. 그는 이날 탈레반과의 협상 테이블에 하미드 카르자이 전 대통령과 함께 정부 측 협상자로 참석했다.

AP통신은 “그(가니)의 동포와 외국인들이 탈출하려고 경쟁하다시피 했다”며 “이는 지난 20년 동안 아프간 재건을 목표로 했던 서방의 실험이 끝났다는 신호”라고 평가했다.

과도정부 수장에는 친미 인사로 평가되는 알리 아마드 자랄리 전 내무장관이 내정된 것으로 전해졌다.

탈레반의 아프간 접수는 각본을 미리 짜둔 것처럼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행정부를 장악한 탈레반은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한 방침들을 발표하며 국내외 우려를 잠재우기 위해 애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들은 공항과 병원을 계속 운영하고 긴급 물품 공급도 끊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아프간군 해산을 명령하면서 군인들에게 귀향을 허용했다. 외국인은 다음주 새 탈레반 정부에 등록하거나 떠나도록 했다. 강제로 잡아두거나 출국을 방해하지는 않겠다는 얘기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ABC방송에 출연해 “카불에 있는 미 대사관이 완전 철수를 위해 공항으로 이동 중”이라며 “만약 탈레반이 방해한다면 신속하고 단호한 대응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탈레반 대변인이 이날 언론 인터뷰에서 “여성이 히잡을 쓴다면 교육과 일자리에 접근할 수 있고 혼자 집밖에 나가는 것이 허용된다”고 밝힌 부분도 눈에 띈다. 1996년 아프간을 장악한 탈레반은 엄격한 이슬람 율법을 앞세워 여성의 교육과 사회생활을 금지했다. 탈레반 정권이 다시 도래하면서 여성 인권에 대한 우려가 무엇보다 큰 상황이다.

탈레반이 자랄리 전 내무장관을 과도정부 수장으로 유력하게 검토 중이라는 점은 미국 등 서방과의 관계에도 신경을 쓰고 있음을 방증한다. 자랄리 전 내무장관은 미 연방정부 산하 방송국인 미국의소리(VOA)에서 20년간 일한 바 있다. 탈레반 입장에서는 미국이 자신들을 내몰고 수립한 과도정부에서 초대 내무장관을 맡은 인물이기도 하다.

탈레반의 속내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미국과 유럽 각국은 대사관 인력 철수에 속도를 내고 있다. 미 대사관은 민감한 자료를 소각하며 철수 절차에 돌입했다. 영국도 로리 브리스토 주아프간 대사를 오는 16일 저녁 전까지 탈출시킬 계획으로 알려졌다.

미군이 철수하기 시작한 지난 5월부터 거세진 탈레반의 공세는 지난 일주일간 매우 빠르게 전개됐다. 탈레반은 2001년 9·11테러 배후인 알카에다 수장 오사마 빈 라덴을 넘기라는 미국 요구를 거부했다가 공격을 받고 그해 말 파키스탄 접경으로 쫓겨났다.

아프간 정부의 부패와 무능이 20년 전쟁을 허망한 결말로 이끌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공식 병력을 보면 아프간 정부군이 30만명으로 탈레반(7만명)의 4배에 달한다. 하지만 정부군 상당수는 명부에만 존재하는 ‘유령 군인’인 것으로 전해졌다. 부패한 군경 간부들이 급료를 가로채기 위해 허수로 군인 수를 기재했고 한다. 미국 등으로부터 지원받은 천문학적 규모의 돈은 증발했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지난 20년간 1조 달러(1155조원)를 아프간에 쏟아부었다”고 했다.

미국 내에서는 바이든 대통령 책임론이 제기됐다. 미치 매코널 공화당 상원의원은 “바이든 대통령 결정은 1975년 사이공의 굴욕적인 함락보다 나쁜 속편”이라고 말했다. 마이크 로저스 하원의원도 “미국은 아프간 여성과 어린이에게 등을 돌렸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아프간 정부군의 급속한 붕괴는 2400여명의 군인이 사망하고 엄청난 돈이 들었던 지난 20년이 얼마나 무익했는지 보여준다”고 반박했다. 아프간 정부의 뿌리 깊은 부패가 철군 이유이자 패망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날 바이든 대통령은 이달 말 미군 철수를 마무리하겠다는 계획이 바뀌지 않는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미 국방부와 전쟁 비용 프로젝트에 따르면 20년 전쟁 동안 미군 2448명, 나토(NATO) 및 기타 동맹국 군인 1144명, 아프가니스탄 민간인 4만7000명 이상, 아프간 군인과 경찰 최소 6만6000명이 사망했다.

뉴욕타임스는 “아프간 정부의 부패가 지속하자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이 아프간 정부와 군대를 영구적으로 지원할 수 없다’는 생각이 강화됐다”고 보도했다. 아프간 정부는 군인과 경찰에게 최근 몇 달간 급여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월스트리트저널도 “탈레반이 이번 달 주요 도심 공격을 시작했을 때 아프간 군대는 너무 사기가 저하돼 거의 저항하지 않았다. 지방 지도자들과 고위 지휘관들은 탈레반과 항복 거래를 이어갔다”고 지적했다. 실제 탈레반은 이날 마자르 이 샤리프 교전도 큰 피해 없이 승리한 것으로 전해졌다.

아프간은 우리 정부가 지정한 여행 금지국으로 주아프간대사관의 필수 인력만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업 종사자 등 일부 인원이 있었지만 지난 6월 말 정부의 철수 요청으로 지금은 대부분 국내로 복귀한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면서 이들의 안전이 위협받을 경우 유관국과 협조해 대사관도 철수할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강창욱 김영선 기자, 워싱턴=전웅빈 특파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