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무장조직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을 제외한 대도시 대부분을 장악했다.
탈레반은 수도 카불 주변 도시를 점거하고, 불과 11㎞(7mile) 떨어진 곳까지 진격한 상태다. 사실상 수도 진입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미국 철군이 채 끝나기도 전 아프가니스탄 정복이 가능한 상태인 것이다.
탈레반은 정복한 지역에 극단적인 이슬람 원리주의 교리를 적용해 여성과 아이들의 인권 탄압을 이미 시작했다는 증언도 이어지고 있다. 20년 전쟁의 허망한 결말을 놓고 미국 안팎에서 책임론도 제기되고 있다.
거침없는 탈레반
CNN은 14일(현지시간) 오후 탈레반이 아프간 북부 상업도시인 마자르 이 샤리프에 진입했다고 보도했다.탈레반 대변인 자비울라 무자히드도 트위터에 “마자르 이 샤리프가 정복됐다. 주지사 사무실과 경찰 본부, 정보부 건물, 군대 기지 등을 장악했다”고 밝혔다. 탈레반은 도시 점거 뒤 교도소 수감자 전원을 석방하고, 차량과 무기 등 장비를 탈취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마자르 이 샤리프 함락으로 탈레반이 아프간 북부 전역을 장악했다. 탈레반이 철군 완료 3주도 안 남은 상태에서 수도에 접근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 아프간 북부 최대 경제 도시인 마자르 이 샤리프는 수도 방어를 위한 전략적 요충지다. 탈레반이 최근 점령한 헤라트와 칸다하르와 함께 4대 도시로 꼽힌다. WP는 34개 주도 중 22개를 탈레반이 통제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수도를 제외한 주요 도시 점거가 끝난 상태라는 의미다.
앞서 미 국방부는 탈레반이 수도 카불을 제외한 주변 도시를 모두 점거하는 방식으로 아프간 정부를 고립시켜 항복을 받아내는 전술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했다. 이런 작업이 거의 막바지에 달한 셈이다. 탈레반은 이번 공격 성공을 계기로 카불 주변에 병력을 집중시킬 것으로 전문가들은 전망했다.
탈레반은 이날 카불 남쪽 로가르주를 점령한 상태에서 차르 아시아부 지구까지 진격해 정부군과 교전하기도 했다. 아시아부 지구는 카불 외곽에서 불과 11㎞ 떨어진 곳이다. 걸어서 2~3시간 거리까지 다가온 것이다.
카불은 공포에 휩싸였다.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은 아프간을 탈출하려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탈레반이 수도를 포위했기 때문에 사실상 유일한 탈출구가 항공편으로 좁혀졌기 때문이다.
AP 통신은 “공항 터미널 밖 주차장에 설치된 매표소로 짐을 가득 진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카불을 떠나려는 공포에 질린 여행자들”이라며 “아프간 항공사는 최소 2주간 모든 좌석이 예약돼 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WP도 “수만 명의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탈레반의 압제적 통치로 돌아갈 것을 두려워해 고향을 떠났다”고 보도했다.
엇갈린 미국
WP는 “아프간의 급속한 붕괴를 보면서 많은 미국인과 아프간 참전용사들은 20년 동안 흘린 피와 돈이 그만한 가치가 있었는지 의문을 제기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아프간 참전 용사 톰 아멘타는 아프간의 급속한 패망 소식을 들은 뒤 “사망한 전우가 떠올랐다. 명확한 해결책은 없었지만, 이제 어려워졌다고 그냥 튕겨내면 되느냐. 이건 옳지 않다. 정말 화가 난다”고 WP에 말했다.
공화당도 조 바이든 대통령 책임론을 제기했다. 미치 매코널 공화당 상원의원은 “바이든 대통령 결정은 1975년 사이공의 굴욕적인 함락보다 나쁜 속편”이라고 주장했다. 마이크 로저스 하원의원도 “미국은 아프간 여성과 어린이에게 등을 돌렸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아프간 정부군의 급속한 붕괴는 2400여 명의 군인이 사망하고 2조 달러가 들었던 지난 20년이 얼마나 무익했는지 보여준다”고 반박했다. 아프간 정부의 뿌리 깊은 부패가 철군의 이유이자 패망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미 국방부와 전쟁 비용 프로젝트에 따르면 20년 전쟁 동안 미군 2448명, 나토(NATO) 및 기타 동맹국 군인 1144명, 아프가니스탄 민간인 4만7000명 이상, 아프간 군인과 경찰 최소 6만6000명이 사망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아프간 정부의 부패가 지속하자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이 아프간 정부와 군대를 영구적으로 지원할 수 없다’는 생각이 강화됐다”고 보도했다. 이어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봄 철군 발표 전 집무실에서 보좌관들에게 ‘앞으로 1년, 심지어 5년을 더 머물러도 큰 차이가 없으며, (미국이)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아프간 정부는 군인과 경찰에게 최근 몇 달간 급여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NYT는 “아프간 정부군은 지난 며칠간 충분한 식량과 물 없이, 무기도 제대로 갖춰지지 상태에서 전선으로 보내졌다”고 보도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도 “탈레반이 이번 달 주요 도심 공격을 시작했을 때, 아프간 군대는 너무 사기가 저하돼 거의 저항하지 않았다. 지방 지도자들과 고위 지휘관들은 탈레반과 항복 거래를 이어갔다”고 지적했다.
실제 탈레반은 이날 마자르 이 샤리프 교전도 큰 피해 없이 승리한 것으로 전해졌다. 친정부 민병대 소식통은 “아프간 정부군은 예고도 없이 도시에서 철수해 탈레반의 방어선 돌파를 허용했다”고 CNN에 전했다. WP도 “정부군이 먼저 항복했고, 사기를 잃은 친정부 민병대와 기타 세력은 탈레반 공격이 시작되자 곧 포기했다”고 보도했다.
크리스 머피 상원의원은 “20년간 훈련과 장비를 지원했는데도 이 정도라면, 더 머무른다고 해도 아무것도 바꾸지 못할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한편,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아프간 내 미국 요원의 안전한 감축 등을 위해 미군 5000명 배치를 승인하기로 했다. 탈레반이 임무를 위험에 처하게 할 경우 군사적 대응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달 말 미군 철수 완료 계획은 바뀌지 않는다는 입장도 재확인 했다.
CBS 방송은 복수의 외교·안보 소식통을 인용해 “미국이 72시간 내에 소수의 핵심 인력만 제외하고 주아프간 대사관 직원 대규모 대피를 완료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워싱턴=전웅빈 특파원 im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