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무장조직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영토 대부분을 장악하면서 수도 카불 코앞까지 진격했다. 미군이 떠난 직후 아프간이 ‘남베트남’처럼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점점 커지고 있다.
동맹국들 사이에선 미국을 믿을 수 없다는 회의론까지 나오고 있지만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후회 없다”며 철군 결정을 고수하고 있다. 미군은 오는 8월 말 철수를 완료할 예정이다.
카불 제외 주요 도시 대부분 탈레반 손에
AP통신 등 외신은 14일(현지시간) 탈레반이 발흐주 주도인 마자르-이-샤리프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마자르-이-샤리프는 북부 최대 도시이자 아프간 제4의 도시다. 이곳까지 함락되면 수도 카불 외에 대다수 대도시가 탈레반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된다.
이미 탈레반은 34개 주도 가운데 17곳을 점령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미 제2의 도시인 칸다하르와 제3의 도시 헤라트도 전날 탈레반에게 장악됐다.
또 탈레반은 전날엔 카불에서 남쪽으로 50㎞ 정도 떨어진 로가르주의 주도 풀리 알람을 점령했다. 사실상 카불은 포위된 셈이다. CNN은 미 정보 당국 내부에서 카불이 약 72시간 내에 고립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고 전했다.
앞서 탈레반은 지난 5월 미군 철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후 대규모 공세를 시작했다.
사실상 미군이 대부분 철수한 상황에서 탈레반은 지난 6일부터 1주일 사이에 전체 주도의 절반과 아프간 북부, 서부, 남부 주요 도시 대부분을 휩쓸었다.
미국의 한 당국자는 워싱턴포스트(WP)에 미군에서 90일 이내 아프간 정부가 무너질 수 있다고 전했다. 심지어 일부는 정부 붕괴가 한 달 안에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피난민만 40만명 ↑…대부분 여성과 아동
탈레반의 세력이 커지면서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집을 버리고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카불로 피난을 가고 있다.
이날 유엔난민기구(UNHCR)는 올해 집을 버리고 피란길에 오른 아프간인이 40만명으로 추산된다고 밝혔다. 특히 미군 철수가 본격화한 5월 말 이후 피란에 나선 아프간인만 25만명에 달한다.
이들 중 80%가 여성 또는 아동인 것으로 전해졌다. 과거 탈레반이 지배할 당시 아프간에선 10세 이상 소녀는 교육받는 것이 금지되고, 또 여성에게 전신을 덮는 부르카 착용이 강제되는 등 여성·아동에 대한 반인권 조치가 자행된 바 있다.
미국이 카타르 등 제3국에 난민 수만명을 수용하는 방안을 내놓았고, 캐나다도 2만명까지 난민을 수용하겠다고 밝혔지만, 아프간 난민 다수를 수용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현재 아프간과 국경을 접한 파키스탄에 등록된 난민은 140만명에 달하며, 미등록 난민까지 합치면 30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 믿을 수 없다’…동맹국들 사이 회의론도
아프간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지만, 미국은 여전히 철군을 8월 말까지 완료하겠다는 방침에 변함이 없는 상황이다. 그러자 동맹국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터져나오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아프간의 붕괴가 미국의 신뢰도에 또 다른 타격을 입힐 수 있다’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이같은 내용을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유럽과 아시아의 많은 국가들은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한 이후 미국이 국제문제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줄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미군의 철군과 함께 아프간 정부가 붕괴에 몰린 상황을 보면서 미국이 동맹국들에 대해 무한정 지원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강화되고 있다.
프랑스의 국방 전문가인 프랑수아 에스부르는 “아프간 사태 때문에 미국에 장기적으로 의지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더 깊은 뿌리를 내릴 것”이라고 설명했다.
‘후회 없다’ 철군 고집 바이든…책임론 나올 수도
일각에서는 미국이 아프간을 포기하면, 바이든 행정부의 능력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것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10일 기자들과 만나 “아프간인들은 스스로를 위해 싸워야 하고, 국가를 위해 싸워야 한다”며 “철군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앞서 그는 지난달 8일 아프간 철군에 대한 기자회견에서 “남베트남 대사관 옥상에서 사람들이 헬기를 타고 탈출하던 상황은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WP는 지금 상황은 베트남전 때와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다면서 “미국의 지원을 받는 정부가 보잘 것 없게 보인다”고 지적했다.
라이언 크로커 전 주 아프간 미국 대사는 WP에 “미국인들이 실패한 노력을 보고 바이든의 능력에 의문을 제기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CNN 역시 몇몇 관계자들을 인용해 아프간 사태가 바이든 행정부의 ’영구적인’ 외교적 오점이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다만 미국 내에서는 아프간 철군 결정이 지지를 얻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미국은 아프간 주재 대사관 직원 수를 줄이고 귀국하는 직원의 안전을 위해 카불 하미드카르자이국제공항에 병력 3000명을 임시로 주둔시키기로 했다. 또 쿠웨이트에 만일을 대비한 지원군 3500~4000명도 배치했다.
또 카불 대사관 내 민감한 물품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김이현 기자 2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