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1월 파기환송심으로 법정구속돼 재수감된 지 207일만인 지난 13일 오전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이 부회장은 출소 직후 자택 대신 서울 강남구 삼성전자 서초사옥을 찾은 것으로 알려졌다. 문재인 대통령이 “국익을 위한 선택으로 받아들이며 국민들께서도 이해해 주시길 바란다”는 입장을 밝힌 만큼 이 부회장이 경제 활성화 기여를 의식한 행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이 부회장은 지난 13일 오전 10시 10분쯤 경기 의왕 서울구치소를 나왔다. 몰려든 취재진을 향해 고개를 숙인 이 부회장은 “국민 여러분께 너무 큰 걱정을 끼쳐드려 죄송하다”며 “저에 대한 걱정과 비난, 우려, 그리고 큰 기대를 잘 듣고 있다. 열심히 하겠다”고 말했다. 이 부회장은 이같은 소감을 밝히던 중에도 한 차례 더 고개를 숙였다.
수감 중 충수염을 앓은 이 부회장은 눈에 띄게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늘어난 흰머리도 눈에 띄었다. 7개월 간 몸무게가 약 10㎏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 부회장은 소감을 밝힌 뒤 제네시스 승용차를 타고 서울구치소를 빠져나갔고 이 차량은 곧바로 삼성전자 서초사옥으로 향했다. 이 부회장이 탄 차량은 이날 11시쯤 사옥에 도착한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그는 2018년 2월 석방 당시에는 출소 직후 삼성의료원에 입원 중이던 부친 고(故) 이건희 회장을 찾아갔았다. 또 수감 기간에 건강이 상해있고 취업제한 이슈는 해결된 것이 아니라, 이 부회장이 출소 당일 고 이건희 회장이 잠든 수원 선영을 먼저 찾거나 자택에 가서 휴식을 취할 것이라는 관측도 많았다.
그러나 이 부회장이 휴식 없이 출소하자마자 곧장 회사로 직행한 것은 그만큼 시급한 현안들을 챙기겠다는 강한 뜻을 드러낸 것으로 재계는 보고 있다. 이 부회장은 이날 당장 전 사장단을 소집한 공식 회의를 주재한 것은 아니지만 집무실에서 일부 핵심 사업부 사장 등 경영진과 미팅을 하며 업무 현안들을 보고 받고 파악하면서 경영 일선 복귀를 준비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는 당장 글로벌 반도체 패권 경쟁이 심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초격차 지위를 갖기 위한 대규모 투자와 인수·합병(M&A) 과제가 산적하다. 대표적으로 삼성전자의 20조원대 미국 파운드리 공장 건설 투자 프로젝트 확정이 임박해 있다. 평택캠퍼스 추가 투자, 인공지능 등 미래 사업 분야 인수합병 등도 이 부회장의 복귀와 맞물린 시장의 관심 사안이다. 삼성SDI의 미국 배터리 공장 진출도 조만간 가시화할 전망이다.
이날 문재인 대통령도 이 부회장에 대한 역할을 주문하는 취지의 발언을 하면서, 앞으로 이 부회장의 경영 복귀와 행보에 더욱 큰 관심이 쏠린다. 문 대통령은 이 부회장의 가성방을 두고 여권 일각과 진보진영의 반발이 이어지자 “가석방에 대해 찬성과 반대 의견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며 “국익을 위한 선택으로 받아들이며 국민께서도 이해해 주시길 바란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또 “반대하는 국민의 의견도 옳은 말씀”이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엄중한 위기 상황 속에서, 특히 반도체와 백신 분야에서 역할을 기대하며 가석방을 요구하는 국민들도 많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청와대 고위관계자 역시 “그동안 이 부회장의 가석방을 요구하는 측에서는 한미 정상회담 후속 조치로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구축, 백신 확보 등을 명분으로 내걸었다”며 “문 대통령이나 청와대로서는 이런 국민의 요구가 있으니 이 부회장이 이에 부응하는 역할을 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찬반이 대립하고 있지만, 코로나 위기 극복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판단이 가석방으로 이어진 것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문 대통령의 입장 발표는 이 부회장의 가석방 결정이 내려진 지 나흘 만이다. 법무부는 지난 9일 8·15 가석방심사위원회를 열고 이 부회장의 가석방을 결정했다. 이 부회장은 보호관찰을 받아야 하는 대상으로 보호관찰관의 지도·감독을 따라야하고 5년의 취업제한 대상 조건으로 가석방됐다.
이같은 결정에 정치권을 비롯한 곳곳에선 찬반 논쟁이 이어졌다. 문 대통령과 청와대가 계속 침묵을 이어갈 경우 논란이 계속 증폭돼 국론분열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참여연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등 시민단체들은 이날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 부회장에게 특혜를 준 문재인 정부를 규탄한다”며 문 대통령의 직접 해명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문 대통령이 입장을 밝혀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동안 문 대통령이 언제 언급하는 게 좋을지 저희도 고민하고 있었다”며 “종합적으로 판단해 이 부회장이 실제로 가석방되는 날에 입장을 밝힌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문 대통령이 지난 정권에서는 야권 인사로서 재벌 총수 가석방에 반대하다가 이제는 입장을 바꿨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이 관계자는 “별도로 드릴 말씀이 없다”고만 언급했다.
문 대통령 언급처럼 반도체·백신 분야에서 이 부회장의 역할에 대한 기대가 가장 크다. 이 부회장의 행보 중 평택 반도체 사업장이나 삼성바이로직스의 백신 위탁생산 현장을 방문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일각에서는 대국민 신뢰 회복 의지를 강조하는 차원에서 17일 삼성 준법감시위원회 정기회의에 방문할 것이라는 전망도 내놓는다.
이 부회장이 명절 연휴를 이용해 해외 사업장을 찾은 전례가 많아, 9월 추석 연휴에 해외 출장을 갈 가능성도 점쳐진다. 가석방 상태에서 해외 출국을 위해서는 정부의 승인이 필요하다. 다만 삼성 측은 이 부회장의 활동 복귀 일정과 관련해서는 아직 정해진 게 없다고 설명했다.
재계 관계자는 “취업제한 이슈는 정부가 해제해주지 않는 한 계속 안고 가는 것이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일단 불가피하다”며 “이 부회장이 코로나19 상황에서 국가 경제에 기여하라는 구원투수 역할을 주문 받았으니 막중한 부담감을 안고 빠르게 경영 행보를 펼쳐 나가며 기대에 부응하려고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이 부회장은 오후 7시20분쯤 서울 한남동 자택으로 복귀하며 출소 첫날 일정을 마무리한 것으로 전해졌다. 서울구치소에서 나온 후 곧바로 경영진과의 회의를 진행한 후 약 9시간 만이다. 오는 19일엔 삼성물산 합병 관련 재판이 예정돼 있으며 프로포폴 혐의 첫 재판은 다음달 7일로 연기됐다.
천금주 기자 juju79@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