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과 ‘청주 간첩단’의 20년 숨바꼭질… 왜 지금 구속됐나

입력 2021-08-12 18:09
북한 지령을 받아 미국산 스텔스 전투기 F35A 도입 반대 활동을 했다는 혐의를 받는 충북 청주 지역 활동가 4명이 지난 2017년 5월 충북도청 브리핑룸에서 문재인 대선 후보 지지선언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가정보원과 경찰이 청주 지역 활동가들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강제 수사로 전환한 ‘시점’을 두고 여러 해석이 나오고 있다. 증거가 누적돼 더 이상 뭉개기 어려워진 점이 강제 수사에 착수한 주요 배경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한편 야권에선 고의로 수사를 늦췄다는 의혹의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문재인정부에서 국정원 개혁 작업에 깊이 관여한 한 인사는 12일 “박지원 국정원장 등 현 정부에서 임명한 간부들도 대공수사 파트에서 20년 가까이 진행해온 수사 결과를 외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며 “국정원에는 여전히 국정원의 존재 가치를 간첩 수사로 생각하는 이들도 많다”고 말했다. 정권 기조와 관계없이 누적된 정보가 활동가들의 혐의를 드러냈고, 압수수색으로 확보한 증거들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야당에선 국정원이 고의로 수사를 무마시켜 온 게 아닌지 의심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국회 정보위원회 소속 이철규 국민의힘 의원은 “신병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될 단계까지 이르다 보니 더 이상 중단시키지 못했던 것 같다”며 “수사가 무르익었는데도 국정원이 시간을 끈 게 아닌지 강한 의심이 든다”고 했다.

야당 의심대로 국정원이 수사를 고의로 지연시켰다면 책임론이 불거질 수도 있다. 국정원은 내사 과정에서 활동가 중 연락 담당 윤모(구속)씨가 2018년 북한의 지령문과 대북 보고문을 보관하고 있는 사실을 확인했는데, 지난 5월 압수수색 때는 관련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다. 강제수사 지연으로 증거 확보에 실패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올 수 있다.

반면 여권에선 이번 사건에 큰 의미를 두지 않으면서 시점에 대한 해석도 경계했다. 한 여권 관계자는 “청주 활동가들이 국내에서도 별다른 활동 성과를 내지 못하는 등 영향이 없던 것으로 보인다”며 “사건의 파장 자체가 크지 않다는 판단하에 수사가 공개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풀이했다.

국정원이 사건 공개 시기를 저울질했다는 해석도 나온다. 2024년 대공수사권을 경찰에 넘겨주게 된 국정원이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해 수사 결과를 이 시점에 내놨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선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반론도 있다. 경찰이 국정원과 합동으로 수사를 진행해 오히려 대공수사권 이관이 순조롭게 이뤄질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사기관은 정치적 파급력과 사안의 민감성 등을 고려해 조용하게 사건을 진행하려 했다는 입장이다. 사정기관 고위 관계자는 “국정원과 검찰, 경찰 세 기관 사이에서 ‘수사 상황을 공개해서는 안 된다’는 합의가 있었는데 내용이 알려져 난감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청주 활동가들은 압수수색을 당하자 지난 5월부터 인터넷 매체를 통해 수사 상황을 공개해왔다. 지난 2일 4명 중 구속영장이 기각된 손모씨가 직접 구속영장을 공개하면서 20여년에 걸친 정보 당국의 내·수사 내용이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20여년에 걸친 국정원과 청주 활동가들의 숨바꼭질

청주 활동가들에 대한 국정원의 내·수사는 1990년대 후반까지 그 역사가 거슬러 올라간다. 무려 20여년에 걸친 수사였던 셈이다. 청주 활동가들도 그 동안 수차례 국정원으로부터 부적절한 수사를 받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반발해왔다.

이번에 구속된 이들이 활동했던 ‘새아침 노동청년회’(새노청)은 1990년대 후반 조직됐다. 새노청 회원들은 2000년 9월 28일 ‘충북지역 간첩단 조작 음모사건 기자회견’을 열어 “국정원이 청주지역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간첩단 사건을 조작하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당시에도 국정원은 이번에 구속된 충북동지회 고문 박모씨를 간첩으로 지목했었다. 구속된 충북동지회 부위원장 윤모씨도 핵심 인물로 꼽혔다.

활동가들의 주장대로 국정원은 1990년대 말부터 이들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에게 청구된 구속영장에 기재된 내용을 보면, 국정원은 윤씨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1998년부터 내사에 착수했다고 밝히고 있다. 2007년에도 윤씨를 조사하기 위해 출석을 요구했었다.

또 국정원은 2002년 이후 수십 차례 이뤄진 이들의 중국 방문 이력에 대해 “북한 지령문의 ‘성원들과의 만남이 주로 베이징에서’라는 내용이 확인된다”며 “오래전부터 북한 문화교류국에 포섭돼 국내 활동 중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고 언급했다. 국정원은 이번에 구속된 활동가들이 1990년대 후반부터 새노청에서 함께 활동하다가 북한의 지령을 받고 2017년 8월쯤 비밀조직인 ‘자주통일 충북동지회’를 결성한 것으로 보고 있다.

구속된 활동가 중 고문 역할을 맡았던 박씨와 그의 아내는 2008년에도 간첩 혐의로 부당한 조사를 받고 있다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박씨 부부의 장남이 군 복무 중 중국으로 휴가를 다녀왔는데, 기무사와 국정원이 아들을 상대로 자신들의 간첩 혐의를 불법적으로 조사했다는 주장이었다.

장남은 지난 6월 한 언론에 기고문을 보내 “20년이 넘는 기나긴 사찰, 죽을 것 같은 공포였다”며 “2000년도 국정원에 의한 간첩단 조작사건은 촛불정부인 문재인 정권하에서도 현재 진행형”이라고 항의했다.

법원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4명의 활동가 가운데 3명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수사당국은 추가 수사를 진행하고 있고, 활동가들은 ‘조작 사건’이라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김판 이형민 박민지 기자 p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