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권력 심장부’ 검찰 청사가 툭하면 뚫리고 있다. 스크린도어를 설치하고 가스총·삼단봉을 든 방호인력을 배치했지만 괴한 난입을 막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해 사법기관에 대한 불신을 자초하고 있다.
길이 60~70㎝의 ‘장검’을 든 A(48)씨가 광주지검·고검 청사 1층 중앙 현관을 거쳐 8층까지 난입한 것은 9일 오전 9시 45분쯤.
‘전두환 재판’을 코앞에 둔 광주지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곳 복도에서 A씨는 차장검사 업무보고를 마치고 나오던 생면부지의 검찰 수사관 B씨와 격투를 벌이다 손에 든 흉기로 어깨와 옆구리 등을 찔러 중상을 입혔다.
다행히 수사관 B씨는 장시간 응급수술 끝에 생명을 구했다. A씨는 소동이 일자 달려온 다른 검찰 직원 3~4명에게 제압돼 출동한 광주동부경찰서 강력반에 체포됐다. 이후 구체적 범행동기 등에 대해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다.
문제는 A씨가 옷이나 몸에 감추기 힘든 ‘장검’을 버젓이 든 채 고검장과 차장검사 등 고검 지휘부 사무실이 있는 8층까지 단숨에 올라갔다는 점이다. A씨는 별다른 제지를 받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탔고 스크린도어를 강제로 해제한 뒤 끔찍한 유혈 흉기 난동을 벌였다.
경찰 조사결과 검찰청사 현관에서 엉뚱하게 ‘판사실’ 위치를 묻던 A씨는 ‘비상’ 상황을 감지한 방호원이 동료들에게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황급히 자리를 뜨자 청사에 금세 난입했다.
유리문과 함께 스크린도어가 설치된 검찰청사 1층 중앙현관에 1명, 보안검색대·금속탐지기를 통과해야 하는 민원실에는 2명의 방호원이 배치됐으나 손 쓸 겨를이 없었다. 가스총과 삼단봉을 허리에 차고 무장했지만 괴한 1명을 저지하기는 역부족이었다.
광주지검·고검 청사는 지난 2008년 12월 현직 특수부 부장검사가 집무실에서 흉기를 든 민원인에게 공격당한 ‘뼈아픈 경험’을 했다. 당시 부장검사는 민원인 한 모 씨가 품속에서 꺼내 내리친 철제 공구에 얼굴 부위 등을 맞아 10여 바늘을 꿰매야 했다.
실내 장식 업자인 한씨는 당시 “공사대금을 받지 못했다는 증거가 충분한 데 왜 ‘공람 종결’로 수사를 서둘러 끝내느냐”고 따지다가 부장검사가 “면담 신청서를 작성하고 오라”고 돌려보내자 격분해 미리 갖고 있던 공구를 휘둘렀다.
광주지검·고검은 이 사건을 계기로 전국 검찰청사 중 최초로 스크린도어를 설치하는 등 청사보안을 대폭 강화했지만, 고검 지휘부 눈앞에서 더 잔혹한 유혈 사건이 다시 발생해 체면을 구기게 됐다.
공권력을 집행하는 사법기관 방호체계의 구멍이 너무 쉽게 뚫렸다는 여론이 빗발치자 검찰은 가시방석이다. 제집도 지키지 못하는 검찰을 누구를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청사 내 무기반입을 막기 위한 검색대 등 통제시스템을 강화하고 전문성을 갖춘 2인 1조 방식의 방호인력 배치를 늘려야 한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칼을 막는 방검복 등 만일의 상황에 대비한 관련 장비도 대폭 확충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층별, 출입구별 보안장치를 따로 갖춰 괴한이 혹시 침입하더라도 신속한 이동에 제약을 받도록 하는 등 재발 방지를 위한 효율적 방호체계 구축이 절실하다.
민원인 출입이 비교적 자유로운 청사 정문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광주지검·고검 청사 옆 광주지법 법정동에서는 당일 오후 2시부터 전두환 전 대통령의 항소심 재판이 열릴 예정이었다.
이로 인해 경찰의 경비가 평소보다 삼엄한 상황이었는데도 경 남에서 아무 연고가 없는 광주까지 승용차를 몰고 온 A씨는 경찰 제지를 쉽게 뚫었다. 주차 차단기가 올라간 반대편 출구 쪽으로 역주행하면서 정문을 무사통과했다.
A씨를 특수상해 혐의로 현장에서 검거한 광주동부경찰서는 범행동기에 대해 이틀째 함구 중인 A씨 조사에 프로파일러(범죄심리분석관)을 투입하고 압수한 휴대전화 등의 정밀 분석에 들어갔다.
A씨는 범행 직전 인터넷 블로그에 올린 게시물에 “전라도 것들이 복수를 위해 공부하고 판사, 검사, 변호사가 되어 결국 미친 짓을 했네”라며 지역감정이 실린 주장을 한 것으로 파악됐다. 다른 게시물에서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 세월호 참사, 문재인 정부를 비하한 것으로 전해졌다.
A씨에 대해 10일 구속영장을 신청한 경찰은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해 ‘살인미수’ 혐의 적용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광주=장선욱 기자 sw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