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전 대통령의 ‘건강 이상설’은 사실일까. 1931년 1월 18일생으로 올해 만 90세인 전씨가 9일 광주지법에서 열린 사자명예훼손 항소심 재판 도중 퇴정하면서 고령인 그의 건강이 예전만 하지 않다는 얘기가 나돌고 있다.
그동안 재판에 성실히 임하지 않아 온 전씨가 증인신문 과정 등에 맘 편히 꾸벅꾸벅 졸거나 이따금 ’숙면’을 취해 비난을 사왔지만 재판부가 ‘호흡 불편’을 호소한 그의 건강을 염려해 퇴정을 허용한 것은 처음이다.
실제 재판 출석을 위해 4번째 광주지법을 찾은 전 씨는 한 달여 전과는 확연히 수척한 기색이 역력했다. 회색 양복 차림으로 광주에 도착한 전 씨는 항소심이 재판이 열리던 지난 7월 초 재판 일정을 팽개쳐두고 자택 앞에서 여유있게 산책을 즐기던 모습과도 사뭇 달랐다.
몰라보게 달라진 전 씨의 인상은 쭈그러든 얼굴의 주름 수 만큼 확연했다.
전 씨는 이날 재판부의 ‘불이익’ 경고에 광주지법 201호 법정에 불가피하게 출석했다. 하지만 20여 분 만에 잠에 빠져들어 고개가 뒤로 젖혀지더니 직후 호흡곤란까지 호소해 정상적 재판 진행이 어려웠던 것으로 전해졌다.
안경을 쓴 채 눈만 끔벅 끔벅거리던 전 씨는 당당하던 모습과 달리 정면을 멀뚱히 주시하면서 손은 다리에 모은 채 비스듬히 앉아 헤드셋을 낀 채 자는듯 마는듯 재판을 받았다.
하지만 재판부의 인정신문 과정에서 부인 이순자 씨의 말을 듣고서야 그에 따라 현재 주소와 본적 등을 본인이 진술해야 할 만큼 건강상태가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전씨는 헤드셋을 끼고도 재판부의 질문을 대부분 알아듣지 못해 부인 이씨에게 의존해 겨우 답변을 이어갔다.
법정에 동행한 전 씨의 부인 이 여사는 이날 재판에서 전 씨의 재판 출석이 어렵다는 개인적 편지를 재판부에 전달했으나 구체적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재판 시작 20여 분 만에 부인 이 씨의 손을 잡고 법정을 빠져나간 전 씨는 짧은 휴식을 취했다가 법정 경위의 부축을 받아 다시 법정에 들어왔다. 이후에는 앉아있기가 힘든지 오른쪽 팔을 책상에 걸치고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등 모습을 보였다.
이에 따라 회고록에서 고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지난 5월부터 항소심 재판을 받아온 전 씨의 첫 출석 재판은 25분여 만에 싱겁게 종료됐다.
재판부는 이날 전씨 측 변호인이 신청한 현장검증 조사는 받아들이지 않고 증인만 일부 채택하기로 했다.
100세에 가까운 당시 정웅 31사단장과 참모역할을 한 장사복 전 전교사 참모장 등에 대한 증인신청을 기각하는 대신 광주로 출동한 506항공대 조종사 가운데 1심에 -불출석한 증인 4명에 대한 증인 신문만 하기로 결정했다.
줄기차게 진정한 사죄를 요구해온 5·18 유가족 등은 서울에서 타고 온 차량에 다시 올라 귀갓길을 서두르는 전 씨를 향해 ”구속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들은 전씨가 성실하게 재판에 임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명자 오월어머니집 관장은 ”살날이 얼마 안 남은 전두환이 끝까지 버티면 우리가 용서하고 싶어도 용서할 수가 없게 된다"며 “전 씨는 광주시민과 국민에게 진심으로 사죄하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5·18기념재단과 오월 3단체는 이날 공판에 앞서 ”1심 판결에만 3년 7개월이 걸렸다“며 조속한 판결을 촉구했다.
전 씨를 고소한 고(故) 조비오 신부 유족 측 법률대리인 김정호 변호사는 ”1심 때 전두환은 단 세 번 출석하는 데 그쳤다"라며 “항소심도 버티다가 재판부의 경고에 마지못해 처음 출석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판결문만 117쪽에 달한 1심 재판에서 밝혀질 진실은 다 드러났다고 봐야 한다”며 “전씨가 반드시 태도를 바꿔 진심 어린 사죄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 씨를 고소한 고 조 신부의 조카 조영대 신부는 5·18 당시 계엄군에게 양심고백을 요구했다. 진실을 함구한 채 숨죽이며 살아가는 고통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조 신부는 “긴 세월을 힘들게 지내온 그분들도 어떤 의미에서 피해자”라며 “역사와 국민 앞에서 용서를 빌고 진실을 고백해달라”고 말했다.
경찰은 이날 기동중대와 교통 요원 등을 현장에 배치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전씨는 2017년 4월 출간한 회고록에서 5·18 민주화운동 당시 군의 헬기 사격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를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기술해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됐다. 지난해 1심에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항소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재판부는 전 씨의 건강상태를 구체적으로 다시 검증한 뒤 8월 30일 재판을 재개할 방침이다.
이를 두고 광주지역 시민단체들은 “전 씨는 재판 참석이 싫어 건강 이상설을 퍼뜨린 이후 아무렇지도 않게 강원도에서 골프를 즐겼다”며 “재판부가 철저한 건강검증을 하고 건강을 볼모로 과도한 방어권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신중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광주=장선욱 기자 sw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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