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의 정책 목표 중 하나로 ‘고용 안정’을 추가하려는 정치권에 경제학계가 쓴소리를 내놨다. 고용 활성화를 위해 유동성을 늘리는 식의 금융통화정책이 정치적 목적으로 동원될 수 있다는 우려가 반영됐다. 자칫하면 고용률을 높이려다가 물가가 폭등하는 현상을 불러 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치권 불붙인 한은 고용 목표, 학계 나서
비판의 목소리는 한국경제학회 학회지를 통해 표출됐다. 김소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한국은행의 고용 목표 도입’ 논문을 통해 한은의 고용 안정 목표 도입이 어떤 여파를 가져 올 수 있을지를 분석했다. 경제학계에서 이 문제 관련 논문을 내놓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논문에서 검토한 한은의 고용 목표 도입은 정치권이 불붙인 주제다. 모두 3건의 한국은행법 개정안이 국회에 발의돼 있다. 일부 차이는 있지만 한은의 정책 목표에 ‘고용 안정’을 추가하자는 전제만큼은 동일하다. 고용 안정을 위해 금리나 자금 지원을 할 수 있도록 법적 기반을 구비하자는 것이다.
미국·호주 등 일부 국가 중앙은행이 고용을 정책 목표 중 하나로 내걸은 것처럼 한은도 기민하게 변화한 경제 상황에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깔렸다. 일자리위원회를 신설하고 기획재정부·고용노동부를 총동원해도 고용 상황 개선이 요원하자 한은까지 동원하겠다는 취지로도 읽힌다.
고용 위한 통화 증대, 물가 폭등 부를 수도
논문은 경제 상황이 과거와 달라졌다는 점에 대해선 정치권의 인식에 공감한다. 실업률이 오르면 물가가 떨어지는 식의 ‘필립스 곡선’ 원리가 현실과 괴리를 보이고 있는 게 사실이다. 현 상황만 보면 고용 증대를 위해 통화량을 늘려도 과거와 달리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하지만 논문은 이런 인식이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경기가 안 좋을 때 통화량을 늘리면 국내총생산(GDP)이 늘고 신용·자산 가격이 높아지면서 경기가 정상 수준으로 돌아가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한국 사례만 봐도 이 상식이 작동하지 않는다. 논문은 유동성을 급격히 늘린 지난해 GDP가 마이너스였는데도 부동산 등 자산 가격이 증가한 점을 꼬집었다. 이런 비정상적 상황에서 고용 증대를 위해 통화량을 늘릴 수 있도록 허용하면 물가가 급등해 금융 안정성을 저해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해외 사례도 제각각…“도입 신중해야”
해외 사례에 대한 분석에도 비판을 달았다. 정치권 주장처럼 일부 국가 중앙은행이 고용을 정책 목표로 삼은 것은 맞지만 고용률이나 실업률 ‘목표치’를 설정하지는 않는다고 설명했다. 일본·유럽 중앙은행처럼 기축통화국의 경우 정책 목표에 고용이 없다는 점도 들었다. 논문은 “당장 고용 등 실물 목표를 도입하지 않는 것도 방법”이라고 제언했다.부득이 고용을 정책 목표로 추가하겠다면 안전장치를 달 것을 주문했다. 김 교수는 8일 “경기 부양책은 시차를 두고 물가에 반영된다. 최소한 ‘물가 안정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라는 점을 책무로 명시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세종=신준섭 기자 sman32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