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형은 정말….”
동메달을 목에 걸고 시상대에서 내려온 한국 근대5종 국가대표 전웅태(26)가 취재진으로부터 대표팀 주장 정진화(32)의 말을 대신 전해 듣자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
전웅태보다 먼저 믹스트존(공동취재구역)을 지나간 정진화는 “4등만 하지 말자는 마음으로 출전했는데, 그 4등이 나였다. 그래도 다른 선수가 아닌 웅태의 등을 보고 뛰어 마음이 편했다”고 말했다. 이를 전해 들은 전웅태는 씩씩하게 쏟아내던 말을 잇지 못하고 잠시 눈을 감았다. 그 짧은 순간에 전웅태의 머릿속으로 어떤 장면들이 지나갔을까.
전웅태는 지난 5년간 경북 문경 국군체육부대에서 대표팀 동료들과 합숙하며 수영, 승마, 펜싱, 사격, 육상을 매일 세 종목으로 나눠 훈련해왔다. 아침 이슬을 먹고 시작한 훈련은 종종 해가 진 뒤에도 이어졌다.
부대 내 수영장 공사로 외부 시설을 이용할 땐 대표팀 승합차로 산길을 20분이나 가로질러야 나오는 식당에서 올갱이국에 밥을 말아 계란말이를 얹어 먹었다. 그 모든 순간마다 큰소리를 내지 않고 후배들을 다독인 대표팀 주장 정진화가 있었다. 전웅태는 다시 입을 열어 정진화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진화형은 정말 ‘맘따남’이거든요. 마음이 따뜻한 남자…. 후배들을 항상 앞에서 끌어주고, 힘들어하면 먼저 챙겨주는 진화형을 보면서 정말 배울 게 많다고 생각했어요.”
정진화에게 도쿄올림픽은 세 번째 도전이었다. 2012 런던올림픽에 처음 출전해 한국 근대5종 사상 최고 성적 타이기록인 11위에 도달했고, 그 이후 합류한 전웅태·이지훈(26)과 함께 ‘황금세대’를 완성한 대표팀의 대들보다.
근대5종은 20세기 유럽을 상징하는 종목이다. 사격과 육상을 혼합한 레이저 런은 크로스컨트리를 변형한 종목이다. 올림픽 금메달은 대부분 유럽의 몫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한국 근대5종은 2010년대 중후반부터 돌연 신흥 강자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2018년부터는 출전하는 대회마다 금메달을 쓸어 담았다. 그해 근대5종 월드컵 시리즈와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을 석권해 세계 랭킹 1위도 찍었다.
그 중심에 정진화가 있었다. 정진화의 선수 인생에서 유일하게 남은 미완의 과제는 올림픽 메달이다. 하지만 도쿄올림픽 근대5종 남자 개인전이 열린 7일 일본 도쿄스타디움에서 정진화는 메달을 목에 걸지 못했다. 총점 1466점을 획득한 정진화의 순위는 4위. 앞서 출전한 두 번의 올림픽보다 좋은 성적을 냈지만, 이번에도 시상대에 발을 들이지 못했다. 한국 근대5종의 올림픽 도전 57년사에서 첫 번째 메달을 획득한 주인공은 후배 전웅태였다. 전웅태는 근대5종의 마지막 종목인 레이저 런에서 정진화보다 20.11초 먼저 결승선을 통과해 동메달을 확정했다.
눈앞에서 날아간 정진화의 꿈. 하지만 정진화가 먼저 생각한 건 팀이었다. 올림픽만 세 차례 출전한 대표팀 주장은 긍지와 팀스피릿으로 마음을 무장하고 있다. 정진화는 결승선을 통과한 뒤 전웅태를 부둥켜안았다. ’우리가 해냈다‘는 성취감과 ’나는 메달을 놓쳤다’는 아쉬움이 눈물로 쏟아져 땀과 뒤섞였다. 정진화와 전웅태의 강렬한 포옹은 올림픽방송서비스(OBS) 카메라에 포착돼 도쿄스타디움 전광판으로 상영됐다.
장내에서 코칭스태프, 선수들과 함께 환호성을 지르고 국내·외 체육계 관계자들로부터 축하를 받던 최은종(53) 감독은 전웅태의 메달을 기뻐하면서도 정진화를 떠올렸다. 최 감독은 “정진화가 좋은 성적을 냈지만 경기 막판에 우리 선수끼리 동메달을 경쟁하는 상황에 놓였다. 정진화를 생각하면 마음이 좋지만은 않다”며 아쉬워했다.
그래도 경기를 끝낸 감독은 선수들을 다독여야 한다. 최 감독은 “아무리 지도를 잘해도 결국 경기를 뛰는 건 선수다. 좋은 제자들, 좋은 선수들을 만났다”며 대표팀 선수 모두를 치켜세웠다.
정진화는 믹스트존에서도 눈물을 거두지 못했다. 정진화는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을 마친 뒤 도쿄올림픽까지 (5년을) 준비한 기간이 힘들었고, 전웅태가 메달을 획득한 기쁨에 많이 울었다”며 “나는 그저 선배들이 닦아놓은 길을 달려온 것뿐이다. 후배들도 그 길을 따라올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근대5종은 세계적인 강자로 지위를 유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도쿄=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