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년 동안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시장 인근 거리와 상가 등에서 노점상과 가게를 운영해온 이모(80)씨는 지난달 27일과 28일, 이틀 연속 장사를 하지 못하고 집에서 쉬어야 했다. 이씨는 현재 구청이 관리하는 간이건물 형태의 잡화점을 운영 중인데 가게 바로 앞에 넓은 그늘을 만들어줬던 플라타너스 나무가 기둥만 남은 채 잘려나가면서 온몸으로 햇볕이 쏟아진 탓이다. 한나절 무더위에 노출된 이씨는 어지러움과 두통 증세까지 나타나자 장사를 쉬기로 결정했다. 이씨가 명절을 제외하고 이틀 연속 장사를 하지 않은 것은 55년 만에 처음이었다고 한다. 이씨가 쉬는 동안 그루터기만 남아 있던 나무는 지난달 28일 뿌리째 뽑혔다.
이씨는 4일 “구청에서 정비사업을 한다며 ‘나무를 조금 자른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한여름에 나무 뿌리까지 다 뽑을 줄은 몰랐다”면서 “폭염이 이렇게 심각한데 나이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시장 인근 지역에서 그늘 역할을 하는 가로수를 뽑아낸 게 이해가 안 된다”고 말했다.
영등포구는 지난달 13일부터 영중로와 영등포로 일대 보행친화거리 조성사업을 시작했다. 이 사업에는 가로수 정비 작업도 포함됐다. 지난달 22일부터 영등포시장사거리~영등포로터리 640m 대로변 양측 구간과 지하철 5호선 영등포시장역~영등포시장사거리 300m 대로변 양측 구간에서 가로수를 잘라내고 뿌리째 뽑는 작업이 이뤄졌다. 서울시에 따르면 올여름 가로수 정비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곳은 영등포구가 유일하다.
문제는 폭염이 한창인데 정비사업이 진행되면서 무더위를 피할 나무 그늘도 모두 사라졌다는 점이다. 실제 이날 사업 구간 일대를 살펴보니 가로수가 뽑힌 곳에는 안전차단봉이 설치돼 있었고, 수백미터 구간 도로에는 손바닥 크기의 그늘조차 없었다.
영등포시장사거리 인근 지하쇼핑센터 출입구에서 나온 한 노인은 양손에 짐을 가득 들고 걷다 쏟아지는 햇볕이 야속한 듯 하늘을 반복해서 쳐다봤다. 노인은 수십 미터를 채 걷지 못하고 햇볕이 덜 내리쬐는 인근 상가 문턱에 앉아 5분 넘게 쉬었다. 가로수가 사라진 건 인근 버스정류장도 마찬가지였다. 시민들은 정류장 그늘 바로 아래 다닥다닥 모여서 버스를 기다렸다. 인근 식당 상인은 “왜 하필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이 시기에 정비사업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영등포구는 보행자 안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로수를 제거했다는 설명이다. 기존 플라타너스 가로수는 40년이 넘어 기둥 안쪽이 썩어 있는 경우가 많았고, 바람이 세게 불면 부러질 수 있는 상태였다는 것이다. 잎이 크고 많은 나무 특성상 상가 간판을 가린다는 일부 상인들의 불만도 제기됐었다.
다만 영등포구는 굳이 한여름에 사업을 진행했어야 하느냐는 점에 대해 해명했다. 영등포구 관계자는 “가로수를 뽑고 새로 심기 위한 심의위원회가 지난 4월에 개최됐고, 안건 통과 이후 용역업체 선정 등의 절차를 거치다 보니 7월에야 사업이 시작됐다”며 “폭염 시기와 맞물려 공사가 진행된 점에 대해서 송구스럽다”고 말했다. 영등포구는 이팝나무와 은행나무를 대체 가로수로 심는 등 오는 11월까지 보행친화거리 조성사업을 마무리한다는 방침이다.
전성필 기자 f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