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백신 접종 증명서가 새로운 필수 ‘아이디’로 부상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델타 변이가 확산하면서 코로나19 백신 접종 증명을 요구하는 업체가 늘고 있어서다.
대부분은 자사 직원들을 대상으로 지침을 마련했는데, 최근에는 고객에게까지 백신 증명을 요구하는 사례가 생기고 있다. 백신 접종 증명서나 코로나19 음성 확인서를 보여주지 않으면 출입을 일절 금지하는 식이다.
기업 단위는 물론 식당, 백화점, 상점 등 시민 일상에 밀접한 영역 등이 이 같은 움직임에 동참하고 있다. 사실상 ‘백신 여권’의 현실화다. 일각에선 프랑스 등 유럽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회적 갈등이 미국에서도 나타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제기한다.
현실화한 백신 여권
프랜시스 콜린스 미 국립보건원 원장은 1일(현지시간) CNN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예방접종을 받도록 장려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는 것이 좋다”며 “(직원들에게 백신 접종 증명을 요구하는) 기업들은 올바른 방향으로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말했다.지난주 이미 디즈니월드, 월마트, 구글, 페이스북 등이 직원들에게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의무화할 계획을 밝혔는데, 이를 재차 독려한 것이다. 차량공유 서비스 업체 우버와 리프트도 사무실 복귀 직원의 경우 백신 접종을 완료해야 한다는 지시를 내렸다.
CNN은 “민간 기업들이 백신 접종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 백신 접종 의무화에 대한 모멘텀이 구축되고 있다”며 “주요 기업들이 백신 의무화를 시작했고, 유명 식당 등이 속속 동참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고객도 백신 접종 증명해야
특히 델타 변이 확산으로 상황이 심각해지자 백신접종 증명을 고객에게까지 요구하는 업체들이 늘고 있다.
미 외식기업 ‘유니언 스퀘어 하스피털러티 그룹’ 대니 마이어 회장은 “직원뿐만 아니라 고객도 백신을 맞아야 한다. 백신 접종 증명 없이는 식당에서 손님을 접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모건스탠리도 백신 접종을 완료하지 않은 고객의 본사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미국 주요 도시에선 소규모 업체도 백신 출입증 움직임에 합류하고 있다. ABC 뉴스는 고객에게 백신 접종 증명서를 요구하기로 한 워싱턴DC 소재 레스토랑과 술집 사장 여러 명의 목소리를 이날 전했다.
워싱턴DC 북부에서 대형 식당을 운영하는 크리스 파워스씨는 인터뷰에서 “직원과 고객 모두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레스토랑과 바에서 편안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하려는 조치”라고 말했다. 그는 “백신 접종 기록이 적힌 카드나 이를 찍은 사진을 확인하는 식”이라고 덧붙였다.
또 다른 식당인 ‘아이비 앤 코니’는 백신 증명서는 물론 마스크 착용까지 강제하고 있다. 식당 주인은 “옆자리에 앉은 사람도 예방 접종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 긴장을 푸는 데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LA타임스도 “캘리포니아 주에서 점점 더 많은 식당이 고객에게 백신 접종 증명서나 최근의 음성 테스트 결과를 요구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백신 증명을 요구하고 있다는 한 식당 관계자는 “고객이 식당을 예약하면 미리 요구 사항을 알려주고 있다”며 “일부는 방문을 거부했지만, 지금까지는 대부분 지침을 이해하고 준수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명 레스토랑 운영자 폴 칼트씨는 “보건당국 개입으로 식당 운영이 완전히 중단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더 많은 레스토랑에서 유사한 요구를 부과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델타 변이 확산으로 록다운이 벌어지기 전 업주들 차원에서 백신 증명을 확대할 것이라는 의미다.
백신 접종자 치명 증상 0.001% 미만
백신 접종 확대를 위한 홍보전도 강화하고 있다. 미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최신 데이터를 인용해 “백신 접종은 코로나19 감염으로 인한 심각한 질병과 사망을 예방하는 데 99.999%의 효과가 있다”고 강조했다.CDC에 따르면 지난 7월 26일 현재 미국 내 돌파감염 사례가 6587건 보고됐고, 이 중 6239명이 입원했다. 이 중 사망자는 1263명이다. 숫자 자체만 봤을 때는 커 보이지만 당시 미국에서 백신 접종을 마친 사람은 1억6300만 명이 넘는다. 비율로 따지면 돌파감염 사례는 0.004%, 입원 사례는 0.0038%에 그친다. 사망자는 0.0007%에 불과하다. 돌파감염의 74%가량은 65세 이상 성인에게서 발생했다.
CNN은 “이 데이터는 코로나19 백신이 전염병 확산을 늦추고, 추가 고통을 피할 수 있는 국가의 최선책임을 의미한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코로나19 확산세는 가파르다. 미국에서 코로나19 신규 확진자가 10만1171명(지난 30일 기준)으로 지난 2월 6일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다.
앤서니 파우치 미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NIAID) 소장은 ABC방송에 나와 “접종이 가능한 1억 명 가량이 아직 백신을 맞지 않았다. 우리는 비접종자 중 생기는 발병을 보고 있다”며 “델타 변이 급증으로 상황이 더 나빠지고, 미국은 더 큰 고통을 겪을 것 같다”고 말했다.
워싱턴=전웅빈 특파원 im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