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연극인 이성규(73) 선생이 보내온 약도를 보면서 부산역에서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탔다. 경성대 인근 남천역 지상은 비가 내렸다.
“하이마트 간판이 보이면 오른쪽 골목으로 꺾으면 소극장 간판이 보일 겁니다. 그리로 내려오시면 됩니다”
이 선생은 문자로 알려 왔고, 극장 초입(初入)에 매달린 ‘엑터스 소극장’ 간판은 연극 소품처럼 느껴졌다. 동아대학교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그는 대학연극반 시절부터 연극에 미쳐 살아왔고 당시 사실주의 연극보다는 실험극과 부조리 연극을 전투적으로 하면서 대학 생활을 마쳤다.
“대학에서 연극을 하던 시절은 사실주의 연극에는 흥미를 못 느꼈어요. 제가 살던 동네가 피난민들이 살던 곳입니다. 전쟁 후유증으로 바다에서 밀려온 병들고 쓰러져 죽어나간 시체들이 길목에 쌓여있는 걸 보고 자랐습니다. 어려서부터 죽음이 무감각하게 몸에 밴 겁니다. 그러한 광경들이 무감각하게 느껴질 정도여서 그런지 인간과 삶의 실존적 철학을 느낄 수 있는 베케트 작품을 좋아했어요. 성찰할 수 있는 연극이 여전히 좋아요”
40년을 부산에서 연극만을 바라보고 달려온 이 노장의 연극인은 장남인 아들이 연극을 때려치우고 공무원이 되길 바랬다.
아버지 나이가 된 아들은 그 길을 가려고 직장 생활도 해봤지만 서른 중반에 사비(私費)를 털어 ‘부두극장’을 지어 버렸다. 종심(從心)의 나이를 돌아설 무렵에는 연극에 대한 집착은 더 커졌다.
“여전히 저는 실험극을 꿈꾸며 극장으로 나옵니다. 연극을 하는 동안에는 청춘이 됩니다. 허허”
80석 규모의 극장은 텅 비어 있었고 연극을 하면서부터 평생 구독해온 월간 한국연극은 분장실 한편에 쌓여있었다.
| 부산연극 연출가 이성규 ‘소극장이 저한테는 꿈에 무대였습니다’
대화하는 두 사람은 빈 무대를 바라보는 관객이 됐고 조명은 켜 달라고 했다.
“극장은 연극인으로 살아온 40년의 삶이고 분신(分身)이겠습니다.”
이 선생의 시선은 무대를 바라보며 말을 했고, 질문은 옆모습을 보며 했다.
“이 극장이 네 번째거든요. 1984년도에는 부두극장을 지었고, 86년도에는 가마골 소극장으로 합류했어요. 95년도 연당 소극장을 지나서 그다음이 여기 액터스소극장이에요. 극장이 없으면 삶의 존재 이유가 없죠. 재미가 없어요. 극장에 오면 숨도 쉬어지고 창조적인 작업을 할 수 있죠. 특히 소극장 연극은 어릴 때부터 꿈이었으니까 소극장에 집착했어요. 큰 극장 공연 보러 가서 실망한 적도 많았고, 사람들과 밀착해서 더 다양한 작품을 할 수 있는 소극장이 꿈이었죠. 소극장을 가졌기 때문에 연극을 할 수 있었고요”
-선생님은 여전히 부조리 연극이나 실험적인 작품들을 많이 하시더군요. 젊은 관객들한테는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는 작품들일텐데.
“20대 층의 관객들도 많이 보러옵니다. 연극의 본질로 공연해도 저는 희망적이라고 생각해요. 특별히 그렇게 하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는데, 부조리극을 많이 했어요. 부산에서 번역극을 하는 일은 드물거든요. 일종의 아웃사이더, 소극장 연극 정신이 있죠. 제일 처음에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고 깜짝 놀랐어요. 연극으로 인생을 총체적으로 그릴 수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고 읽어보니까 또 쉬워요. 왜냐면 그 당시 코미디언 故 배삼룡 씨 같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렇다면 할 만하다,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죠. 소설로 읽어도 될 이야기나 신문에 나오는 이야기로 연극을 하는 것보다는 삶의 의혹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부조리극이 마음에 닿았고, 그래서 자꾸만 하게 됐어요. 예술가는 자기 색깔, 자기 방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지금은 변해야 한다는 생각도 있는데 굳어버린 것도 있는 것 같지만요”
-연극도 경쟁의 시대인데 선생님은 경쟁 밖에 계시는군요.
“경쟁해서 얻는 게 뭐 있겠습니까. 별로 신경 안 씁니다.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경쟁해서 관객 많아지고 돈 많이 벌고 상 타고 그래서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잘하든 못하든 자기 길로 가는 게 맞죠”
-이번에 공연된 <환도와 리스>도 페북 댓글과 공연정보들은 부조리극이었는데도 진지하게 공연을 봤다는 얘기들을 하더군요.
“<고도를 기다리며>와 <승부의 종말>에 비해 <환도와 리스>는 좀 더 가볍게 접근해서 올렸어요. 평가도 상당히 좋았고 젊은 층의 관객들, 대학 전공자들도 공연을 보러 많이 왔습니다. 젊은 관객들이 가볍고 대중적인 작품 만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이번에 더 알게 됐어요. 요즘 시대에 연극이 다시 본질로 접근하는 것도 희망적이라고 생각이 들더군요”
-70여 작품을 해오셨는데. 무거운 작품으로 젊은 층의 관객들과 연극적인 소통을 하시는 것 보면 선생님의 고집스러움이 느껴집니다.
“요즘 시대 연극을 보면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해요. 나도 대중적으로 재미있는 걸 해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은 있는데 못 하고 있는 거죠. 부산창작극연구회를 통해 극작가를 발굴하려 하고는 있는데 제 마음에 쏙 드는 작품은 못 만났어요. 제가 쓰려고 해도 안 써지고요. 제가 처음 접한 <쥐 사냥>이라는 작품은 관객을 쓰레기장에 비유하는 공격적인 작품이에요. <생사계>는 마임과 춤이 어우러진 공연이고, 두 작품 다 퍼포먼스 공연이죠. 지금까지 해왔던 형식과는 다른 작품이라 기억에 남고요. 애정이 가는 작품은 역시 <고도를 기다리며>죠. 지금까지 여섯 번 공연했는데 볼수록 좋은 작품이라 생각하고요. 이번에 공연한 <승부의 종말>도 걱정이 많았는데 관객분들이 좋아해 주셨어요. 공연의 집중도가 좋아서 재밌게 봤다는 평을 많이 들었습니다. 10대 관객도 간혹 오긴 옵니다만. 40대 이상이 많아요”
-관객 얘기를 나누면서 그의 표정이 밝아졌다. “청소년들도 선생님 작품을 보러 소극장으로 온다는 건, 연극이 여전히 희망적이네요”
“그렇죠. 여전히 진지한 연극에 관심 있는 관객이 있다는 건 희망적이죠. 많은 관객은 아니지만 작품마다 차이가 조금 있지요”
<승부의 종말> 공연을 할 때 페이스북에 “오늘 예약 관객이 너무 없어요. 지금이라도 빨리 전화 예약 바랍니다”라는 글을 올렸고, 다음날은 “소품 하나 구합니다. 당근 마켓에도 없네요”라며 페이스북 SNS에 실시간으로 올렸다.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 중에는 “끊임없이 페북질해도 예약이 저조합니다. 27일 공연은 현재 사전 예약이 12명입니다. 미루지 마시고 빨리 예약하세요”
-페북으로 ‘지금이라도 빨리 전화 예약하세요’라고 올리면 유저들 반응이 오던가요?
(웃음) “스스로 홍보해야 하죠. 나이가 들다 보니까 젊은 사람들과 교류가 활발하지 않고, 부산연극도 흩어지고 있어요. 주로 저를 아는 친지나 제 연극을 좋아하는 관객이 오고, 대중적으로 크게 알려지고 그러진 않습니다”
이 선생은 표현에 가공(架空)이 없었다. ‘싫고, 좋음’이 명확해 보였고 그렇게 연극을 해왔다. 고집스럽게 연극을 지키고 소극장을 떠나지 않았던 그에게 ‘연극의 본질’을 섬기며 살고 싶은 수도승처럼 느껴졌다. 물었다.
-서른 중반에 극장을 세우고, 연극을 다시 시작한다고 할 때 공무원의 길을 바라셨던 아버님이 큰아들한테 원망을 많이 하셨겠어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가 말았어요. 결국에는 아버님이 원하는 대로 길을 갈 수가 없었습니다. 연극에 대한 미련으로 직장 생활도 잘못했으니까요. 연극이 하고 싶었죠, 대학 때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는데 연극반 생활을 같이했거든요.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연극을 했죠. 회사에 취직해서 일하는데 삶이 삶 같지가 않더라고요. 매일 반복되는 일에다 무역회사니까 접대도 많았거든요. 지겹고 너무 힘드니까 그때 일을 그만두고 사비로 부두극장을 지은 거예요. 84년도에 지었는데 86년도에 지하철 공사로 헐렸죠. 그러면서 부산에 있던 7~8개 극단이 졸지에 다 없어지고 가마골 소극장 하나 남아서 이거라도 키워야 한다 하고 다들 그쪽으로 모였죠”
-40년 동안 연극을 하면서 버티기 쉽지 않으셨을 텐데.
“연당소극장을 하면서 집을 팔았거든요. 집사람도 연극을 반대하진 않았는데 그러고 나니까 인식이 안 좋아졌죠. 제 아내는 대학 극회 출신이고 연극을 같이 했던 사람이라 초창기에는 많이 도와주고 그랬는데 요즘은 연극 이야기도 잘 안 해요. 40년 동안 지역에서 고집스럽게 연극을 해오면서 연극이 가장 나답다고 생각했어요. 직장 생활하는 친구들을 만나서 이야기해도 서로 이해도 안 되고요. 어쩌면 그게 오기 내지는 외로움인 것 같아요. 아직도 무대를 바라보면 설레는 게 첫사랑 못 잊은 느낌이랄까요”
-선생님 인터뷰 자료를 찾아보니까 80년대는 “연극이 유일한 즐거움”이라고 하셨고, “성찰 없는 오락적 가벼운 작품을 경계한다”라고 하셨어요.
“너무 오락적인 연극은 보다가 견딜 수가 없더라고요. 관객들도 볼 때는 재밌다고 웃지만 나오면서 ‘연극이 다 저런 건가’ 하더라고요. 다양성은 인정하지만 글쎄요. 저는 지금도 제가 더 젊다고 생각해요. 젊은 친구들 연극 보면 너무 빤하고 내용이 없을 때가 많아요. 그래도 좀 더 연극다운 연극을 하길 바라는 기대를 자꾸 하죠”
-시대가 젊은 연극인들의 현대적인 작업 스타일로 많이 바꿔가고 있고 연극도 지원 사업에 의존할 수밖에 없지요.
“부산은 말하자면 ‘내가 남이가’ 하는 끈끈함이 있었어요. 지금은 그게 다 무너지고 프로덕션 시스템이 되었죠. 저도 단원을 두고 있지 않아요. 단원이라고 해도 다른 데서 작업할 수밖에 없고 월급도 줄 수 없잖아요. 뭘 많이 못 해주는 게 부담이에요. 편한 대로 다니라고 놔두고 작품 할 때만 같이 하죠”
-‘내가 남이가’로 모여서 절박하게 연극을 했던 분위기가 많이 바뀐 것 같습니다.
“같이 작업해볼까 하고 젊은 연극인을 만나면 만나자마자 ‘페이는 어떻게 되나요’ 하고 물어요. 페이의 함의는 계약 관계예요. 나를 동료가 아닌 고용인으로 생각하는구나 싶어서 진이 빠지죠. 필요한 이야기지만 그런 의식에는 어떤 작품이든 상관없이 아르바이트로 하겠다는 의도가 있으니까 깊은 이야기는 안 되죠. 나이 든 사람으로서 회의감을 느끼는 일이 많아요. 관객들이 많이 찾는 연극이라고 해서 보면 작품보다는 배우를 좋아하는 경우가 많고요. 부산에서 연극을 해오던 원로 연극인도 남아 계신 분이 별로 없어요. 전성환 선생님과 김문홍 선생님, 그리고 저예요. 친구가 없으니까 김문홍 선생님하고만 여기 극장에서 종종 만나서 이야기를 하죠”
이성규 선생은 부산연극에 대해 많은 아쉬움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단원 한 명이 아이스커피를 가져오자 시원하게 마시면서 인터뷰를 하자며 답답한 듯 담배를 피웠다.
“연극이 어려운 시기에 뭉쳐서 끈끈하게 버텨야 하는데 지금은 어떻게 보면 연극이 아르바이트잖아요. 연극을 업(業)으로 일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목숨 걸고 하는 사람끼리 뭉쳐서 가야 길이 보이는데 각자 다른 삶을 사니까 서로 무슨 생각으로 연극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런 게 아쉽죠”
-아쉬워도 연극으로 달려온 인생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하셨어요.
“간혹 후회할 때도 있죠. 가족들 봤을 때.(웃음) ‘연극이 내 본성에 맞는가’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의외로 이성적이고 소심한 사람인데 연극인은 외형적으로 되어야 한다고 그러잖아요. 연극이란 동네는 마음이 힘든 사람들도 많이 모이는데 때로는 그게 저한테 힘들 때도 있어요. 나는 그 정도 에너지가 없는 사람인데, 치기 어린 사고방식을 보면 피곤하죠. 미투도 있었지만, 말로만 연극이 대단하다 하고 문제나 일으키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아직도 연극계에 그런 사람들이 있잖아요. 연극 하나 파고들기도 힘든데 엉뚱한 데까지 신경쓰려니까 힘들죠”
그는 40년의 연극 인생 중 84년도에 아파트를 팔아서 지은 원당 소극장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이 선생의 연극에 대한 전투력은 대학연극반과 부산에서 80~90년대에 연극을 하면서 지내던 시절을 이야기할 때 소리는 커졌다.
“84년도 초창기나 연당소극장 시절도 좋았어요. 제일 처음에는 월급 털어서 했고, 연당소극장은 아파트를 팔아서 했으니 그만큼 열정과 애정이 있었죠. 연당소극장에서 <생일파티>, <고도를 기다리며>, <롤리타> 같은 작품을 했었어요. 그때 김윤석, 송강호 배우도 5~6년 같이 했죠. 또 돌이켜보면 연극반 시절이 가장 전투적이었던 거 같아요. 부족하니까 더 열심히 했죠. 여러 과 학생들이 모이니까 더 재밌는 게 많았어요. 첫 작품으로 <밧줄>을 했고, 그때 <승부의 종말>도 했죠”
-40년 전 <승부의 종말>과 지금 연극을 하시던 기억이 선명하시군요. 그때와 지금, <승부의 종말>은 차이가 있던가요?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한 거죠. 배우도 저도 서툴렀어요. 최근에 다시 할 때는 죽음과 가까이 있으니까 마음가짐이 좀 다르죠. 제가 하는 작품이 죽음과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에요. 왜 그런가 생각해보니까 어릴 때 영도에서 살았는데, 바로 바다에 닿아있는 지역이었어요. 그때가 1950년대인데 미군도 왔다 갔다 하고 태풍이 불면 시체도 많이 떠내려와요. 그걸 보면서 어릴 때부터 삶의 허무를 일찍 느껴버린 거죠. 도둑질하고 싸우는 것도 많이 봤고요. 그러니까 험악한 걸 너무 봤어요. 그런 것도 연극의 뿌리가 됐을지 모르죠. 외로움, 고독, 허망함 이런 걸 어릴 때 내적으로 많이 느꼈어요”
그는 전쟁통의 화염으로 죽어 나간 시체들이 바다에서 동네로 밀려 떠내려 온 광경들을 바라보며 어린 시절을 보내고 연극을 하면서도 삶과 죽음을 다뤄온 노장의 연출가도 인생은 “하나의 꿈처럼 느껴져요. 세월이 가는 게 꿈을 꾸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무대에서 여전히 꿈을 꾸고 계시잖아요.
“이제는 편하게 연극을 하고 싶어요. 지하 소극장에서 이제는 지상에 올라가고 싶다고 그래요. 제 별명이 ‘지하대마왕’이에요. 지상에서 시스템이 갖춰진 연극을 하고 싶어요. 아직도 맨땅에 헤딩하는 것 같아요. 헤딩을 너무 오래 하니까 힘에 부치죠. 같이 연구하고 공부할 수 있는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도 받으면서 같이 하고 싶어요. 작품적으로는 재미있는 연극, 제가 코미디를 잘하거든요. 재미있는 블랙코미디 하고 싶어요”
-40년의 연극 인생 중 연출자로 여전히 풀리지 않는 작품이 있죠?
“오래전에 경성대 콘서트홀에서 장 주네 <발코니>를 한 적 있어요. 전반부는 괜찮았는데 후반부가 잘 안 됐다고 생각해요. 다시 온전하고 올리고 싶은데 과연 그 작품을 하자고 했을 때 같이 할 배우들이 있을지 고민이에요”
사진 촬영을 위해 엑터스 소극장 분장실로 들어갔다. 분장실은 소품 창고가 되어 있었고 극장을 옮기며 부산에서 연극을 해온 40년 연극 인생이 특정한 장면처럼 놓여 있었다. 평생 구독해온 월간 한국연극은 이 선생의 키만큼 쌓여있었고 소극장 간판은 그의 연극 인생을 닮아 있었다.
“올해 11월에 창작극을 해요. 부산 광안리 바닷가에 극장이 생겼어요. 거기서 <쥐 사냥>을 올려보자 해서 하반기에 이 작품도 올릴 생각입니다”
대경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