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 지 6주 만에 시골 초등교사 출신 좌파 후보 페드로 카스티요(51)의 당선이 확정됐다. 앞서 대선 사기 의혹을 제기해 당선인 발표를 지연시켰던 우파 후보 게이코 후지모리가 뒤늦게 결과에 승복하겠다는 입장을 내면서 선거 불복 사태도 막을 내렸다. 부패 혐의를 받는 후지모리는 대선에서 패배하면서 이른 시일 내에 재판에 넘겨질 위기에 처했다.
페루 국가선거심판원(JNE)은 19일(현지시간) 카스티요를 대통령 당선인으로 공식 발표했다. 지난달 6일 대선 결선 투표가 치러진 지 43일 만이다. 카스티요는 당시 투표에서 50.12%를 득표해, 우파 후보 게이코 후지모리를 4만4000여표라는 간발의 차이로 제쳤다. 선거심판원은 신중한 검토를 거쳐 6주 전에 나온 이 투표 결과를 최종 확정했다. 카스티요 당선인은 오는 28일부터 프란치스코 사가스티 임시 대통령으로부터 자리를 물려받아 5년간 페루를 이끌게 된다.
혼돈과 분열의 페루 대선
지난달 7일 개표 결과 근소한 차이로 카스티요가 앞서자 후지모리 측은 대선 사기 의혹을 제기했다. 이어 각종 부정과 사기 의혹이 있는 20만표를 무효화 해달라고 요청했으며 30만표는 재검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선이 치러진 지 40일이 넘도록 당선인 발표가 지연됐다.불확실한 정국 속에 양쪽 지지자들의 시위도 이어졌다. 카스티요 지지자들은 정당한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는 후지모리의 행동을 ‘쿠데타’라고 비난하며 수도 리마의 선거심판원 건물 앞에 천막을 치고 선거 결과를 서둘러 확정할 것을 촉구했다. 후지모리 지지자들 역시 근처 대법원 청사 밖에 진을 치고 ‘공산주의자’ 대통령이 나와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선거심판원은 당선인 발표를 보류한 채 약 한 달간 후지모리의 주장을 신중하게 검토했지만 그의 손을 들어주진 않았다. AP통신에 따르면 미주기구(OAS)와 미국 유럽연합(EU) 등도 선거에 부정이 없었다고 밝힌 바 있다.
선거 불복을 시사했던 후지모리는 선거 당국의 발표를 앞두고 결과에 승복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RPP뉴스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후지모리는 리마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선거) 결과를 받아들이겠다. 그것이 내가 수호하겠다고 맹세한 법과 헌법이 명령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카스티요는 대선 과정에서 나타난 정치적 분열을 의식한 듯 이날 공식 발표 직후 승리 연설에서 통합을 강조했다. 그는 “국정을 도우려는 모든 페루인이 환영받을 것”이라며 “모두를 환영한다. 여러분의 경험을 보여달라”고 말했다. 다만 후지모리를 향해서는 “페루의 전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나 방해물’이 없어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치 신인 시골 초등교사의 반란
카스티요는 페루 역사상 최초의 농민 출신 대통령 당선인이다. 페루 역사학자 세실리아 멘데스 샌타바버라대 교수는 “페루에서 전문직, 군부 인사, 경제계 엘리트가 아닌 대통령은 없었다”고 말했다고 AP는 전했다. 25년간 시골 초등학교 교사였던 그는 2017년 교사들의 처우 개선 등을 요구하며 벌인 총파업을 주도해 이름을 알렸지만 중앙 정치무대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그러나 지난 4월 치러진 대선 1차 투표에선 18.9%로 깜짝 1위를 차지하며 결선에 진출했다. 2차 결선 투표를 앞두고 우파 세력이 후지모리 쪽으로 결집하며 초박빙의 승부가 펼쳐졌지만 막판 추격을 뿌리치는 데 성공했다.
카스티요는 정치 경력이 거의 없어 부패와 거리가 멀고, 문맹의 농부 부모 아래 태어나 서민의 대표라는 점이 승리 요인으로 꼽힌다. 페루 정치권은 지난 몇 년 사이에 대통령이 다섯 번이나 바뀌었으며 모두 부패 혐의로 곤욕을 치렀다. 이에 기존 정치권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커지면서 부패와 거리가 먼 카스티요의 매력이 부각된 것으로 보인다. 환경운동가 마루하 잉키야는 “카스티요는 약속을 안 지키고 빈자를 보호하지 않는 다른 정치인들과 다를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급진 좌파 성향으로 분류되는 카스티요는 대선 기간 개헌과 에너지산업 등에 대한 국가 통제 강화, 1년 100만개 일자리 창출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부녀 대통령’ 꿈꿨으나 ‘부녀 감옥수’ 될 가능성 커져
부정 의혹을 제기하며 개표 결과를 뒤집으려던 후지모리의 필사적인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2011년, 2016년 대선에 이어 세 번째 결선 패배다.1990∼2000년 집권한 일본계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대통령의 장녀인 그는 아버지의 후광으로 2006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이어 보수 신당 민중권력당을 창당한 후 2011년 대선에서 페루 첫 여성 대통령이자 부녀 대통령에 도전했으나 결선 투표에서 패배했다. 이후 2016년 대선에도 도전했으나 ‘독재자의 딸’을 향한 반감을 꺾지 못하고 패배의 쓴잔을 들이켰다.
앞선 두 번의 패배와 달리 이번 대선은 대통령 면책특권이 달렸다는 점에서 후지모리에게 더욱 중요한 선거였다. 후지모리는 2011과 2016년 두차례 대선 출마를 위해 브라질 건설기업 오데브레치로부터 불법 선거 자금을 지원 받은 혐의로 받고 2018년 체포됐다. 이후 16개월간 구속 상태에 있다가 지난해 5월 코로나19 사태로 조건부로 석방됐다. AFP통신은 후지모리가 선거에서 패배하면 그의 부패 재판은 임박해질 것이며 승리할 경우 임기 만료인 2026년 이후로 연기될 것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
선거 불복 논란 끝에 패배가 확정된 후지모리는 부녀 대통령이 아닌 ‘부녀 죄수’가 될 위기에 처했다. 후지모리의 부패 혐의를 수사하는 담당 검사는 지난달 10일 법원에 후지모리의 재구금을 요청했다. 페루 검찰은 후지모리에게 징역 30년 형을 구형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반인륜범죄 등으로 25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아버지 후지모리 전 대통령도 사면을 기대할 수 없게 됐다.
임송수 기자 songst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