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적일 수 있는 ‘인권’이 가슴 저리게 다가오는 순간은 ‘내’가 피해를 보았을 때다. 엄마 오복(정애화)은 한평생 학교도 못 다니고 시장에서 고등어를 팔아 자식들을 키웠지만, 대학 나온 딸이 결혼한다는 소식에 자신의 삶이 행복하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런 그의 존엄성이 무너진 건 같은 시장 동료에게 성폭행을 당하고도 너무나 쉽게 그의 존재가 외면당하면서다.
지난해 제21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부문 대상작 ‘갈매기’는 우리네 엄마들의 대표 격인 ‘오복’의 이야기를 다룬다. 성폭행을 당한 우리네 어머니 오복은 주저앉지 않는다. 오히려 산부인과에 가서 자신의 몸을 돌보고, 제3자를 통해 가해자에게 사과를 요구한다.
다만 그런 오복의 요구는 너무나도 쉽게 외면당하고 만다. 가해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가해 사실을 부정하고 오히려 오복을 위협한다. ‘생존권’ 다툼을 벌이고 있는 경제 공동체 수산시장에선 중년여성 오복의 피해는 ‘길 가다 똥 밟은 정도’의 사소한 일이 돼버려 ‘가십거리’로 소비된다. 한 상인은 오복이 술을 좋아한 게 잘못이라는 ‘망언’까지 일삼는다.
헌신으로 일군 가족이라는 운명공동체에서도 오복은 ‘을’이다. 평생을 함께해온 남편은 ‘성폭행은 여자가 동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을 듣는다. 큰딸의 결혼이라는 중대사를 앞두고도 ’사돈집에 혹여나 소문이 날까 내 고통을 숨겨야 하나’하는 갈등도 찾아오기까지 한다. 큰딸의 도움을 받아 겨우 경찰에 신고할 때에도 증거를 찾아오라는 형사를 마주할 때도 ‘내가 학교에 다녔다면…’이라고 인생의 회한이 밀려온다.
영화는 중년 여성의 성폭행 사건과 해결 과정을 섬세하게 다룬다. 성폭행에 관련한 직접적인 묘사는 어떤 경우에도 배제했다. 한국 사회에서 미투 운동이 퍼지던 2018년 상반기에 기획된 만큼 오복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2차 가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었다. 김미조 감독은 19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오복이 어떻게 처참하게 고통당했는지가 아니라 성폭행을 당한 오복이 어떻게 이를 극복하고 삶을 이어가는지가 중점이었다”고 말했다. 오복은 영화 끝에 자신의 이름을 밝히며 당당히 가해자의 앞에 선다.
영화에는 김미조 감독이 마주했던 사회 갈등이 녹아 들어가 있다. 그는 “미투 사건 중 하나인 서지현 검사는 처음에 사과만을 원했다. 사건을 은폐하려고 할수록 사건이 드러나는 걸 보면서 오복이 정말 원한 건 사과가 아니었을까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또한 안희정 전 충남지사 사건도 그의 마음을 건드렸다. “안 전 지사의 부인은 남편이 성폭행한 게 아니라 불륜 행위를 한 것이라고 이야기했을 때, 성폭행과 불륜 다 정의가 아닌 게 너무 이상하다고 느끼며 시장 상인들의 모습을 구상했다”고 말했다.
오복 역을 맡은 24년 차 베테랑 배우 정애화는 기자간담회에서 눈물을 쏟았다. 오복의 삶이 자신의 삶에서 멀리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제가 만약 오복에게 일어난 일을 당했다면 ‘내 탓’을 했을 거다. 가부장적이고 남성 우월적인 억압적인 환경에서 많은 영향을 받으면서 자란 60대이기 때문”이라며 “작품 덕분에 움츠러들지 않고 성장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딸들은 ‘나는 엄마처럼 안 살 거다’라고들 하는데 영화를 보면 문득문득 엄마 목소리가 들린다. 우리 엄마가 도움이 참 많이 됐다”고 덧붙였다. 28일 개봉
김용현 기자 fa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