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두 종류의 부모님과의 관계를 갖는다. 첫째는 과거에 만들어진 관계다. 우리가 어떻게 자랐는지, 부모님이 우리를 어떻게 다뤘는지, 그리고 우리는 부모님에 대해 어떻게 느꼈는지 등이다. 둘째는 현재 나와 자녀와의 관계다. 여기서 과거와 현재는 밀접히 연관되어 유사성을 보인다고 한다. 하지만 그게 결정적이며, 바뀔 수 없는 걸까?
고등학교 1학년 여학생인 M은 엄마와 심한 갈등을 겪는다. 반항이 심해서 엄마에게 소리를 지르고 심할 때는 몸을 밀치기도 하고, 가출을 하겠다고 부모를 협박하기도 한다.
“엄마한테서 벗어나고 싶어요, 지옥 같아요. 공부가 너무 끔찍했지만 엄마가 무서워서 열심히 했어요. 그래서 특목고에도 들어갔는데, 엄마는 이제 제가 뚱뚱하다고 구박을 하며 다이어트를 시키는데 모든 행동을 감시하고 제 몸에 대해 끔직한 말을 하면서 모욕감을 주니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어요”
그러면서 M은 평소보다 더 많이 먹고 식욕이 폭발해서 폭식을 하게 된다. 살이 너무 쪄서 고민이 되어도 자제하기가 힘들다. 어려서 M은 ‘껌딱지’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엄마를 졸졸 따라다니는 아이였다. 엄마를 떨어지는 것도 힘들어 했고, 사소한 것까지 엄마에게 물어봐야했다. 사실 현재도 심하게 반항할 때도 많고 ‘가출하겠다. 독립하겠다’ 하지만 혼자서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고 반드시 엄마에게 물어보고 결정을 위임하는 편이다.
사실 엄마도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다. 성격이 강하고 카리스마있는 엄마에게 많이 의존하고 살았지만, 강압적이고 감정적인 어머니에게 상처받고 심하게 다툰 후, 현재의 남편과 충동적으로 이른 결혼을 했다.
다행히 남편은 온화한 성격으로 자신의 화를 다 받아주고 참아 준다. 친정 엄마하고는 여태 단절하고 교류 없이 지내고 있어 비로소 어머니로부터 벗어나 독립했다고는 하지만 사실 미움을 간직한 채 화해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
정서적으로 의존된 관계를 ‘융합’이라고 하고, 융합의 반대는 독립성, 혹은 분화라고 한다. 그런데 많이 저지르는 실수는 자신의 가족을 회피하는 사람의 가장된 독립성을 진짜 분화, 독립과 혼동하는 것이다. 분화라고 하는 것은 자율적인 정체감을 성취하는 것이지 자신과 자신의 가족 사이에 거리를 두거나 단절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과 관련해서 도망갈 수는 있지만 가족으로부터 숨을 수는 없다. 가족으로 부터 도망한 M의 엄마는 자신의 의존성을 딸에게 표현하고 있었다. 딸이 자신의 경계에서 벗어나는 것이 불안해 ‘아이가 미덥지 못하다’는 핑계로 포장하여 아이의 행동 하나하나를 간섭하고 통제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가족’이라는 것은 ‘이상한 성질을 가진 본드’와 같다고 한다. 본드의 속성처럼 벗어나려고 해도 절대로 나가게 놔두질 않고 진득하니 끌어당긴다. 부모의 원 가족과의 관계에서 해결되지 않은 정서적인 문제는 이상한 본드처럼 다음 세대로 전이되는 거다. 참으로 질기다.
어떻게 이런 본드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먼저 엄마가 현재 상황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자신의 행동의 결과를 깨달아야 한다. 즉 자신의 불안(결국 의존성이 해결되지 못해 비롯된)을 피하기 위하여 한 행동(아이를 구속하고 통제하고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행동)이 일시적으로는 자신을 덜 불안하게 하고 아이에게 안전한 환경을 준 듯 안도감이 들게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부모 자녀 관계를 악화시키고 아이로 하여금 의존적이고 충동적인 행동(폭식, 반항, 분노 폭발, 가출)등으로 귀결됨을 알아차려야 한다.
금지옥엽, 정성으로 키운 딸과 자신의 관계를 바라보자. 결과가 얼마나 절망적인가? 하지만 절망으로 끝난다면 해결 방법은 없다. 극단적 절망은 새로운 희망을 잉태한다. 여기서 눈을 감고 상상해보자! 들판에서 땀을 흘리며 열심히 삽질을 하다 구덩이 빠진 사내가 있다. 구덩이 안에서 탈출하는 방법이 무엇일까? 옆에 있는 삽을 들고 열심히 삽질을 계속한다면 구덩이에서 빠져 나올 수 있을까? 아니다 오히려 구덩이는 더 깊어 질 거다. 아마 삽을 놓는 것부터가 탈출의 시작일 거다. 또 지금까지 해왔던 익숙한 방식을 포기하는 것이 쉽진 않다. 그래서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기꺼이 딸을 놓아주는 결단이다. 아마 불안할 거다. 하지만 불안 또한 인생에서 숙명적으로 함께 가야할 ‘친구’다.
이호분(연세누리 정신과, 소아청소년 정신과 전문의)
# 반항하는 아이 # 식욕을 조절 못하는 아이 # 충동적인 아이 # 자녀와 갈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