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 폭염, 산불… “우리는 기후변화 한가운데 있다”

입력 2021-07-17 01:00
서유럽에 100년 만의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진 가운데 15일(현지시간) 벨기에 리에주 인근 베르비에시의 침수된 거리에서 차들이 구겨진 채 뒤엉켜 있다. 지난 14∼15일 독일 서부와 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가 접한 지역 대부분이 폭우를 겪으면서 벨기에에서는 최소 11명이 사망했다. AFP연합뉴스

세계적으로 이상 고온 현상이 이어지는 등 지구촌 곳곳에서 기상이변이 속출하고 있다. 서유럽에서는 100년 만에 기록적 폭우가 쏟아졌으며 북미를 포함해 북반구 곳곳이 폭염으로 인해 호흡 곤란을 호소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상기후의 원인을 기후변화로 진단하고 기후 위기를 코로나19와 같은 비상사태로 다뤄야 한다고 촉구했다.

서유럽 100년 만의 기록적 폭우, 고온‧습기 품은 저기압 탓
15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전날 발생한 폭우로 독일과 벨기에에서 9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벨기에에서는 최소 11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갑자기 불어난 물로 주요 도로가 침수되고 철도 운행이 중단됐으며, 통신두절로 인해 연락이 되지 않거나 실종된 사람이 1000명이 넘어 사상자가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피해 지역에서는 붕괴한 잔해가 길을 막으면서 구조 작업마저 더딘 것으로 전해졌다.

전례를 찾기 힘든 폭우다. CNN에 따르면 24시간 동안 이들 지역에서는 평소 한 달여 기간의 강수량에 해당하는 100∼150㎜에 달하는 ‘물 폭탄’이 쏟아졌다. 안드레아스 프리드리히 독일 기상청 대변인은 CNN과의 인터뷰에서 “일부 피해지역에서는 100년 동안 목격하지 못한 양의 비가 왔다”면서 “몇몇 지역에는 강수량이 배 이상 늘었고 이는 홍수와 건물 붕괴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앞서 지난 12일 영국 런던에서도 몇 시간 동안 100㎜에 달하는 폭우가 쏟아져 홍수가 발생했다.
독일 서부 슐트에서 15일(현지시간) 폭우와 홍수가 휩쓸고 간 주택가의 잔해 사이를 소방관과 주민이 걷고 있다. 현지 매체는 라인란트팔츠주에 내린 집중호우로 30여명이 실종됐다고 보도했다. 로이터연합뉴스

서유럽의 기록적인 폭우는 정체된 저기압 소용돌이가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결과다. 영국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기상 전문가들은 ‘베른트’로 알려진 정체된 저기압대가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등 국가에 집중적이고 연속적인 폭우를 유발했다고 분석했다. 저기압대가 품은 습기와 고온이 폭우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영국 기상청 관계자도 런던에서 발생한 폭우에 대해 “런던 주변 지역 기상이 영국 상공에 영향을 미쳐 집중적인 소나기의 원인이 됐다”면서 “열과 습기가 집중 호우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기록적인 폭우가 내린 벨기에 남동부 리에 지역에서 15일(현지시간) 물이 가슴까지 차오른 거리를 한 여성이 걸어가고 있다. AFP연합뉴스

북반구 ‘살인 폭염’에 몸살
서유럽을 조금만 벗어나면 폭염이 말썽이다. CNN은 “전례 없는 더위가 수백 명을 숨지게 하고 도시를 파괴했다”며 “기후변화가 북반구를 태우고 있다”고 보도했다.

리사 러포인트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 수석 검시관은 “지난달 25일부터 이달 1일까지 이어진 1주일간의 폭염으로 800명이 돌연사했다”며 “이는 일반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사망자 수보다 500명 이상이 많은 것”이라고 밝혔다. 워싱턴포스트(WP)는 “이번 폭염으로 최소 1600만명의 캐나다인들이 약 37.8도 이상의 기온에 직면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15일(현지시간) 미국 오리건주 클래머스 폴스 인근에서 소방대원들이 '부트레그 산불'을 진화하고 있다. 고온 건조한 날씨로 미 서부 곳곳에서 산불이 발생하는 가운데 소방 당국은 1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준비 단계를 최고 단계로 격상했다. AFP연합뉴스

폭염 속에 초대형 산불도 잇따르고 있다. AFP통신은 2018년 발생했던 대형 산불 사태가 재연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고 보도했다. 미 오리건주 프리몬트 와이네마 국유림 내 스프라그강에서 시작된 화재는 5일 만에 서울 면적에 맞먹는 14만3000에이커(약 578㎢)를 집어삼켰다. 포틀랜드 남부에서 발생한 산불도 제주도(약 1847㎢) 절반 면적인 919㎢를 태운 상태다.

북미뿐 아니라 러시아 인도 이라크 등 북반구 곳곳에서 폭염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는 지난달 23일 34.8도를 기록해 6월 기온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으며, 동토지대인 시베리아도 이상 고온으로 대형 산불에 몸살을 앓고 있다.
1일(현지시간)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한 남성이 거리의 대형 선풍기로 더위를 식히고 있다. 이라크 정부는 폭염에 대응해 이날을 공식 휴일로 선포했다. AP뉴시스

중동의 이라크는 50도가 넘는 폭염의 영향으로 전기 시스템이 붕괴되고 주민들의 생활에 어려움이 생기자 수도 바그다드를 포함한 여러 지역에서 지난 1일을 공휴일로 지정하는 대책을 내놓았다. 남아시아의 인도는 지난달 30일 수도 뉴델리와 주변 도시들이 극심한 더위를 겪고 있다며 기온이 계속 40도를 웃돌아 평소보다 7도 정도 높아졌다고 밝혔다.

지중해 국가 키프로스도 폭염을 피해가지 못했다. 로이터는 키프로스 정부 대변인을 인용해 4일 가뭄과 더위의 영향을 받은 대규모 산불로 농업 근로자 4명이 사망했다고 전했다. 키프로스 산림부 관계자는 언론과 인터뷰에서 “키프로스 역사상 최악의 산불”이라고 밝혔다.
9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플레이서빌 지역 소방관들이 도일에서 발생한 산불 현장을 바라보고 있다. AP연합뉴스

겨울 평균 기온이 11도? 남반구는 역대급 따듯한 겨울
기온이 오르면서 겨울로 접어든 남반구는 따뜻한 겨울을 보내고 있다. AFP통신에 따르면 뉴질랜드의 6월 평균 기온은 섭씨 10.6도로 1909년 기상관측 이래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이는 지난 30년간의 6월 평균 기온보다 2도 높으며, 종전 최고기록보다 0.3도 높은 것이다.

국립물대기연구소(NIWA) 기상학자 그레거 마카라는 “남극이 있는 남쪽보다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많았고 바다의 수온도 상승하는 등 여러 요인이 작용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뉴질랜드 평균 기온은 한 세기 동안 1도가량 올랐다”며 “이런 흐름이 지속되면 겨울은 점점 짧아질 것으로 예상한다”고 덧붙였다.

일상이 된 기상이변…전문가 “기후변화 탓”
전문가들은 지구촌을 강타한 폭염과 폭우의 원인으로 기후변화를 지목했다. 기온이 상승하면서 폭염과 폭우 등 기상 이변 현상도 잦아졌다는 분석이다. 미 비영리 환경과학단체인 버클리 어스에 따르면 유럽에서 300년 전 기온 기록이 시작된 이후 지난해가 가장 더운 해였으며, 지금까지 가장 더웠던 10년 중 8년이 지난 10년간에 포함됐다.

일반적으로 따뜻한 공기는 습기를 더 품게 되고 폭우가 발생 가능성을 높인다. 취리히 공대는 최근 연구를 통해 지난 1981년부터 2013년 사이에 유럽에서 폭우가 내리는 날이 과거 30년과 비교해 45%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폭우로 인한 홍수와 해수면 상승은 네덜란드와 벨기에 같은 저지대 국가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 유럽환경청(EEA)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해수면이 1900년 이후 20㎝ 정도 상승했는데, 해빙이 빠르게 진행되면서 21세기 말에는 80㎝ 정도 수준까지 상승할 수 있다고 예측했다.

프레드 하터만 포츠담 기후변화연구소 연구원은 “올해 목격하는 극단적인 기후 현상은 우리 예상과 일치한다”면서 “우리는 이미 기후변화의 한가운데 있다”고 강조했다.
지난 14일(현지시간) 폭염과 가뭄으로 수위가 낮아진 미국 캘리포니아주 마데라의 헨즈레이 호수 바닥에 소형 보트 한 대가 놓여 있다. 미 서부 지역에서 계속되는 대가뭄과 이상 고온은 도시 지역 식수뿐만 아니라 농촌 방목지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기후 전문가들 “기후 위기도 비상사태로 다뤄야”
스코틀랜드헤럴드 등에 따르면 영국 글래스코 칼레도니아대(GCU) 산하 기후정의센터는 13일 발간한 보고서를 통해 기후변화 문제를 코로나19 팬데믹과 같은 비상사태로 다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구진은 “공공 민간에서 유력 인사 다수가 기후 변화가 궁극적으로 코로나19보다 훨씬 치명적인데도 정부와 시민 사회에서 동일한 수준의 시급성을 이끌어내지 못했다”고 입을 모았다.

이어 연구진은 코로나19 팬데믹 동안 일일 사망자와 확진자를 집계한 것처럼 악천후 등으로 인한 인명 손실과 피해 상황도 실시간으로 보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대중에게 기후 위기에 대한 정보를 보다 적극적으로 알려야 경각심을 심어줄 수 있다는 설명이다.

UCS 수석 기후학자인 아스트리드칼다스 박사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기후 변화가 이미 오늘날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기후 회복력이나 고온 대응 계획을 세우지 않는 한, 기후 변화가 가속화됨에 따라 다수의 사람들이 극심한 더위로 고통받고 사망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임송수 기자 songst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