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환경’으로 포장한 신개념 보호무역?… EU, 세계 첫 탄소국경세 제안

입력 2021-07-15 17:01 수정 2021-07-15 17:06

유럽연합(EU)이 환경오염을 유발하는 모든 수입품에 세계 최초로 ‘탄소국경세’를 매기기로 했다. 화석연료 의존도가 높은 산업이나 신흥국에는 ‘환경보호’를 명분으로 한 보호무역주의 강화나 다름없는 조치다. 추진 과정에서 산업계 반발과 무역분쟁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EU 집행위원회는 14일(현지시간) 2030년까지 역내 온실가스 순배출량을 1990년 대비 55% 줄이겠다는 목표로 12가지 입법안을 발표했다고 AP통신 등은 전했다.

‘핏 포 55(Fit For 55)’로 불리는 이 방안은 같은 기간 감축량이 40%였던 기존 목표를 크게 높이면서 더욱 강력한 탄소배출 규제를 담았다. EU는 2050년까지 온실가스 순배출량을 0으로 낮춰 ‘탄소중립’을 달성한다는 계획이다.

핵심 규제는 EU 역내 제품보다 탄소배출량이 많은 수입품에 추가로 환경 비용을 부과하는 탄소국경세다. 탄소배출비용 부과 대상이 EU 회원국을 너머 사실상 모든 나라 기업으로 확대된다는 얘기다.

탄소국경세는 철강, 시멘트, 알루미늄, 비료 등을 대상으로 5년 뒤인 2026년부터 적용된다. 이들 제품을 해외에서 들여와 쓰는 유럽 기업은 세금을 더 내야 하는 만큼 수입량을 줄이거나 비용 부담을 수출 기업에 전가할 가능성이 높다. 해당 제품을 주로 사용하는 유럽 내 산업은 물론 유럽 수출로 먹고사는 기업은 어떤 식으로든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뉴욕타임스(NYT)는 “건설에 사용되는 시멘트나 유람선에 쓰이는 연료 등이 영향을 받을 것”이라며 “거의 모든 경제 분야가 탄소배출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만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블룸버그통신은 “환경기준이 낮은 나라에서 생산되는 철강, 시멘트, 알루미늄을 수입하는 업자는 배출권 거래 시스템상의 가격으로 특별증명서를 구매해야 한다”며 “비료와 전력을 포함해 해당 상품을 (EU로) 반입하는 데에 대한 사실상 벌금”이라고 평가했다.

가장 크게 영향을 받는 나라로는 터키와 러시아가 지목된다. 두 나라는 각각 EU가 수입하는 시멘트와 비료의 37%, 36%를 공급한다. 알루미늄 수입량의 18%를 납품하는 노르웨이와 철강 14%를 공급하는 중국도 사정권에 있다.

NYT는 “탄소국경세는 세계무역을 흔들고 보호무역주의에 대한 분쟁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글래스고 회담을 앞두고 새로운 외교적 균열을 만들 수 있다”고 논평했다. 오는 11월 영국 글래스고에서는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가 열린다.

EU는 2035년까지 휘발유와 디젤 신차 판매를 사실상 중단하기로 했다. 15년 뒤부터 EU에서 새 차는 전기차를 비롯한 친환경차만 살 수 있다는 뜻이다. 탄소배출권거래 대상에는 자동차, 건물 난방, 항공·선박 운송 등을 새롭게 포함했다.

이들 규제는 27개 회원국 의회에서 각각 승인을 받아야 실행할 수 있는 만큼 산업계와 환경단체가 각각 로비전에 돌입할 것으로 예상된다.

국제구호단체 옥스팜의 이블린 반 로엠버그 EU 대표는 “2030년까지 탄소 배출 감소량이 55%가 아니라 적어도 65%는 돼야 한다”며 규제를 더 강화할 것을 촉구했다고 AP는 전했다.

힐데가르드 뮐러 독일자동차산업협회 회장은 “2050년 탄소중립 달성 목표를 지지하지만 소비자와 기업이 실행할 수 있어야 가능하다”며 “전환에 어려움을 겪을 자동차 제조업체의 일자리에 상당한 영향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EU 회원국 간 입장차도 만만치 않다. 프랑스는 원자력 의존도가 높은 반면 폴란드는 석탄 사용 비중이 높다. AFP통신은 소식통을 인용해 ‘핏 포 55’에 대한 최종 수정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EU 집행위원회가 심각한 내분을 겪었다고 전했다.

영국 BBC방송은 “이번 12개 계획의 규모는 숨이 막힐 정도로 일상의 거의 모든 측면에서 유럽 시민의 삶에 영향을 칠 것으로 보인다”며 “(적용) 범위가 너무 광범위하다”고 평가했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