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든 행정부, 현재로선 미군 파병에 부정적
아프간에선 철군하는데, 아이티 파병 부담
아이티 요구사항 ‘모호’…‘아이티 늪’에 빠질수도
파병 안할 경우 대규모 난민 사태 우려
미국 대신 유엔·미주기구 개입 ‘대안’으로 거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아이티에 대한 미군 파병을 놓고 고민에 빠졌다고 뉴욕타임스(NYT)가 10일 보도했다.
암살범들의 총격으로 조브넬 모이즈 대통령이 숨진 아이티는 미국에 미군 파병을 요청했다.
그러나 바이든 행정부는 아이티 파병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고위 당국자는 “현 시점에서 아이티에 미국 병력을 보낼 어떠한 계획도 없다”고 지난 9일 말했다고 NYT는 전했다.
하지만 미국 플로리다에서 불과 700마일(1127㎞) 떨어진 아이티의 상황이 더욱 악화되고, 미국으로의 난민 유입이 크게 증가할 경우 바이든 대통령의 책임론이 제기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미국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아직 미지수다. 존 커비 미국 국방부 대변인은 11일(현지시간)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아이티의 미군 파병 요청과 관련해 “우리는 국방부에 들어오는 다른 요청과 마찬가지로 그 요구를 분석하고 있다”면서 “(미군의 아이티 파병이) 검토되고 있다”고 말했다.
커비 대변인은 이어 “오늘, 국토안토부와 연방수사국(FBI) 등으로 구성된 합동조사팀이 (모이즈 대통령 암살 사건) 조사 과정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을 살펴보기 위해 아이티로 떠난다”고 설명했다.
바이든 행정부의 고위 당국자는 합동조사팀이 미국으로 돌아와 바이든 대통령에게 상황을 보고한 이후 결정이 내려질 것”이라고 로이터통신에 말했다. 다만, 합동조사팀이 얼마나 아이티에 머물지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로이터통신은 보도했다.
아프간 철군 결정, 잉크도 안 말랐는데…
바이든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우리의 군사적 임무는 8월 31일 종료될 것”이라고 지난 8일 선언했다. 아프간 철군 방침에 변화가 없음을 재차 밝힌 것이다.
NYT는 “바이든 대통령이 아프간 철군 결정을 옹호하는 연설을 한 몇 시간 뒤 아이티로부터 미군 파병 요청이 들어왔다”고 보도했다.
바이든 대통령 입장에선 쏟아지는 비판을 무릅쓰고 아프간 철군 결정을 내렸는데, 아이티라는 새로운 지역에 미군을 파병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NYT는 “바이든 대통령의 의중은 해외 파병 미군을 늘리는 것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미국이 주저하는 다른 이유는 아이티의 파병 요청이 구체적이지 못하다는 점이다. NYT는 아이티 정부가 미군에게 어떤 역할을 기대하는지에 대해서도 불분명한 상황이라고 꼬집었다. 커비 대변인은 10일 기자들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아이티의 요청이 광범위하며, 미군 병력 숫자나 어떤 유형의 군대 파병을 요청하는지에 관련해 모호하다고 지적했다.
극도로 불안한 아이티 상황도 바이든 대통령의 고민거리다. 자칫 잘못 파병했다가 미군 사상자가 늘어나고 철군도 힘든 ‘아이티 늪’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이티의 반미감정도 부담스러운 요인이다. 미국은 1915년부터 20년 동안 아이티를 무력으로 지배했던 역사가 있다. 아이티의 작가이자 사회 운동가인 모니크 클레스카는 CNN에 “우리는 미군을 원치 않는다”면서 “우리는 미국의 지배에 대한 상처를 안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섣불리 파병을 했다가 오히려 곤욕을 치를 수 있다는 것이 미국의 우려다.
아이티 방치했다가 대규모 난민 ‘미국행’ 우려
하지만 파병을 안 하고 모른 체 하기도 힘든 것이 바이든 대통령의 입장이다. 아이티는 미국 바로 밑에 있는 나라다. 아이티의 불안한 정세가 이어질 경우 미국에도 부담이 될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난민의 유입이다. 지난 9일엔 라디오와 소셜미디어를 통해 미국이 망명과 인도주의적 비자를 제공할 것이라는 루머가 돌면서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에 위치한 미국대사관 앞에 수백 명이 몰려들기도 했다. 또 10일엔 어린이를 포함한 수십 명의 사람들이 미국대사관 앞마당으로 들어와 미국행을 요청했다.
NYT는 치안 불안이 계속될 경우 대규모 난민이 바다를 통해 플로리다로 찾아들 수 있다고 전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인도주의를 지향한다고 외쳤는데, 대규모 난민 사태가 현실화될 경우 이들의 수용 여부를 놓고 곤란한 상황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미국에 거주하는 아이티 출신 사람들이 바이든 대통령에 빨리 아이티를 도울 것을 압박하는 것도 변수다. 2018년 인구통계에 따르면 미국에 거주하는 아이티 출신은 100만 명에 불과하지만, 이들 대부분이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플로리다에 사는 것은 무시 못 할 요인이다.
박빙의 표차로 승패가 엇갈리는 플로리다에서 아이티 표심이 ‘반(反) 바이든’으로 돌변할 경우 바이든 대통령에겐 부담이 될 수 있다.
대안으로 거론되는 것은 미국이 직접 나서지 않고 유엔이나 미주기구(북미·중미·남미 지역협력기구)가 아이티 정세 안정에 개입하는 것이다. 또 미국이 미군 파병 대신 아이티의 군대와 경찰을 훈련시키고 지원하는 방안도 부상하고 있다.
워싱턴=하윤해 특파원 justi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