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미국 마약단속국) 작전! 모두 물러서라!”
지난 7일(현지시간) 새벽 1시경, 무장한 남성들이 총기를 들고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의 대통령 관저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미국 억양을 가진 누군가가 확성기를 통해 세 차례 이상 이같이 외친다. 잠시 후 빠른 템포의 총성이 10번 연속으로 들리고 1초 후 2발의 총소리가 더 들린다.
CNN 등 미국 언론은 8일 조브넬 모이즈 아이티 대통령의 암살 당시로 추정되는 영상을 공개했다. 이 영상은 모이즈 대통령 피살 직후 보안요원들이 사저 밖에서 대응하는 모습을 찍은 것이라고 전해졌지만, 진위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CNN은 밝혔다.
사건 직후 대통령 침실과 집무실은 헤집어진 상태였고, 모이즈 대통령은 피 묻은 흰 셔츠와 파란 바지를 입고 입을 벌린 채 쓰러져 있었다. 대통령의 이마와 가슴 엉덩이 배 등에서 12개의 총상이 발견됐으며, 5.56㎜, 7.62㎜ 탄의 흔적인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함께 있던 대통령 부인 마르틴 모이즈 여사 역시 총상을 입어 곧바로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다가 에어앰뷸런스로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병원으로 이송됐다. 모이즈 대통령의 딸 조마리 조브넬은 괴한들의 침입 당시 방에 숨어 있었고, 가사도우미 등 다른 인원들은 괴한들에 포박된 상태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용의자들은 DEA 요원임을 사칭하면서 경호원들을 속이고 사저 안까지 진입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DEA는 미국으로 마약이 들어오는 중남미 관문 중 하나인 아이티의 마약 밀매를 감시하기 위한 조직이다.
하지만 조사 결과 이들은 DEA와 관련 없는 외국인 ‘용병’으로 드러났다. AP통신에 따르면 레옹 샤를 아이티 경찰청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용의자 중 콜롬비아인 15명과 아이티 출신 미국인 2명을 체포했으며 콜롬비아인 3명을 사살했고, 8명을 추적 중”이라고 밝혔다. 이어 이들을 ‘용병’이라고 지칭한 그는 “외국인들이 우리나라로 와서 대통령을 살해했다”며 “공격에 사용된 무기와 물품들도 압수했다”고 덧붙였다.
용의자들 중 11명은 아이티 주재 대만 대사관에서 잡혔다. 대만 외교부에 따르면 안전 문제로 문을 닫은 대사관에 용의자들이 침입했고 이날 새벽 이를 알아챈 대사관 경비요원이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대사관 허가를 받고 경내에 진입해 오후 4시께 체포작전을 벌여 용의자들을 체포했다.
아이티 경찰에 따르면 모이즈 대통령 암살에 연루된 28명 중 26명이 콜롬비아인으로 알려졌다. 디에고 몰라노 콜롬비아 국방장관은 아이티에서 살해된 용의자 중 2명을 포함해 6명의 용의자가 자국 사람이며 퇴역군인이라고 설명했다.
아이티계 미국인 2명의 신원도 공개됐다. 마티아스 피에르 아이티 선거부 장관은 아이티계 미국인 2명이 제임스 솔라주와 조셉 빈센트라고 밝혔다. AP통신은 제임스 솔라주가 자신이 설립한 자선재단 웹사이트에 아이티 주재 캐나다 대사관에서 경호원으로 근무한 경력이 있다고 소개했다고 전했다.
아직 용의자들의 구체적인 신원이나 범행 동기 등은 공개되지 않았다. 이들이 전문 용병일 경우 이들에게 돈을 건내고 암살을 사주한 배후를 밝혀내는 것이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충격적인 대통령 암살 사건으로 아이티 정국은 혼란에 빠졌다. 클로드 조제프 임시총리는 이날 긴급 각료회의를 거쳐 아이티 전역에 군사 계엄령과 함께 2주간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수도의 포르토프랭스 국제공항도 폐쇄됐다. 뉴욕타임스(NYT)는 “아이티 국민들은 불안에 떨며 라디오 앞에 몰려들어 뉴스에 귀 기울이고 있다”고 전했다.
임송수 기자 songst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