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츠하이머 투병 등 건강을 이유로 재판에 불출석한 전두환 전 대통령이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 근처에서 홀로 산책을 즐긴 모습이 포착됐다. 누구의 부축도 없이 꼿꼿한 자세로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나들이를 즐겼고, 취재진을 향해 고함을 치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재판부, 4차례나 피고인 출석 필요성 강조
광주지법 형사1부(김재근 부장판사)는 5일 오후 1시57분 광주지법 법정동 201호 형사대법정에서 전 전 대통령의 사자명예훼손 사건 항소심 2회 공판기일을 열었다. 지난 재판에서 주심 판사가 코로나19 확진자의 밀접 접촉자로 분류돼 격리됐다가 복귀하면서 이날 공판 갱신 절차를 밟게 됐다.
형사 재판 피고인은 신원 확인을 위한 인정신문이 열리는 첫 공판기일과 선고기일에는 출석해야 하며 공판 갱신절차를 진행할 때에도 출석해 다시 인정신문을 해야 한다. 하지만 재판부는 전 전 대통령이 2회 연속 정당한 사유 없이 법정에 나오지 않자 방어권을 포기한 것으로 보고 피고인 없이 궐석재판을 진행했다.
다만 재판부는 한 시간 동안 재판을 진행하면서 4차례에 걸쳐 피고인 전 전 대통령의 출석 필요성을 강조했다. 재판부는 “검사가 형사소송법 365조를 근거로 인정신문 절차가 꼭 필요하다는 의견을 개진했지만 인정신문을 하지 않고는 재판을 전혀 진행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라며 “(출석하지 않은) 피고인의 항소 이유는 판단할 필요가 없어 기각해야 한다는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어 재판부는 “한편 이 규정이 인정신문에 불출석한 피고인에 대한 제재 규정이라는 검사 주장에는 동의한다”며 “피고인의 증거 제출 등은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 받아들이고 제한할 수 있다. 입증을 충분히 하고 싶다면 피고인의 출석이 전제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재판에서는 증거조사에 대한 논의를 진행했다. 전 전 대통령의 변호인은 1980년 5월 21일, 같은 해 5월 27일 광주 도심 헬기사격과 관련해 당시 광주로 출동한 육군항공대 조종사들을 증인 신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1심에서 대부분 증인 신문을 하거나 증인 신청을 했음에도 출석하지 않았다며 새로운 증인이 있다면 1, 2명 할 수 있겠지만 피고인이 불출석한 상태에서는 채택하기 어렵다며 보류했다.
앞서 변호인이 국방부 5·18 특별조사위원회와 국회 5·18 진상규명 조사위원회 조사 중 헬기 사격 자료를 법정에서 증거로 다룰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한 데 대해서는 국방부 자료는 진상조사위로 모두 이관됐으며 진상조사위로부터 사실조회 신청 결과를 받는 대로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
재판부는 “형소법 규정은 피고인 불출석에 따른 재판 지연 등을 막기 위한 규정으로, 공판을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이지 아무 제재 없이 재판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며 “피고인이 계속 불출석하면 불이익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전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헬기 사격 목격 증언을 한 고(故) 조비오 신부를 가리켜 ‘신부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하고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됐다. 검찰은 징역 1년6개월을 구형했고 1심 재판부는 지난해 11월 30일 전 전 대통령에게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그동안 전 전 대통령 측은 법리상의 이유로 불출석 재판을 주장해왔다. 지난달 14일 열린 첫 공판 기일은 물론이고 연기된 이날 공판 기일에도 출석하지 않아 피고인 없는 궐석 재판으로 진행됐다. 항소하면서 2심을 서울에서 재판을 받게 해 달라며 관할 이전을 신청했지만 기각됐다.
알츠하이머라더니 광주 대신 자택 근처 ‘나 홀로 산책’
전 전 대통령은 재판 당일인 지난 5일 오전 10시30분쯤 자택 주차장 쪽문을 통해 혼자 집 밖으로 나오다 한국일보 카메라에 포착됐다. 전 전 대통령이 재판에 참석할 의향만 있었다면 연희동 자택을 떠나 광주로 향해야 했던 시간이었다.
한국일보가 공개한 사진을 보면 마스크를 쓰지 않은 전 전 대통령은 흰색 와이셔츠 단추를 맨 위까지 채운 뒤 하늘색 재킷을 입고 있었다. 아이보리색 바지를 입고 윤이 나는 검은색 구두를 신은 화사하고 단정한 차림이었다.
수행원이나 경호원 없이 혼자 자택을 나선 전 전 대통령은 골목을 따라 몇 걸음 옮기다 방향을 틀어 기자가 있는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고 한다. 보폭이 다소 좁고 속도가 느렸지만 누구의 도움도 없이 뒷짐을 지고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그동안 재판정에서 보여준 ‘노쇠한’ 모습은 물론 변호인이 주장해온 ‘건강상의 이유’는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국일보는 전했다.
약 30m 전방에서 자신을 촬영하는 기자를 발견한 전 전 대통령은 잠시 기자를 응시하더니 불쾌한 표정으로 “당신 누구요”라고 고함을 치듯 물었다고 한다. 기자가 “한국일보 기자입니다”라고 대답한 뒤 전 전 대통령을 향해 다가가려는 찰나 자택 맞은편 주택에서 경호원이 나타났다고 한다. 경호원은 사태를 파악하자마자 등을 돌려 선 채 카메라를 가리고 전 전 대통령을 경호원 숙소 건물로 안내했다고 한국일보는 전했다.
숙소 건물로 마지못해 걸음을 옮기던 전 전 대통령은 경호원에게 무언가를 계속 따져 물었고 불쾌한 듯 구겨진 표정도 풀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건물 밖으로 다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재판을 앞두고 건강을 이유로 재판에 불출석해 온 전 전 대통령의 이런 행태는 과거에도 여러 차례 있었다. 2019년 11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며 재판 불출석 사유서를 낸 전 전 대통령은 지인들과 함께 골프를 치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지난해 11월 1일 1심 선고 공판에선 경호원들 부축을 받으며 출석한 뒤 재판정에서 조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뻔뻔한 전두환, 강제구인 등 엄정한 법 집행해야
이 같은 소식이 전해지자 더불어민주당 광주시당은 즉각 논평을 내고 “전씨는 광주에서 재판을 받아야 하는 날 보란 듯이 서울 자택에서 뒷짐을 진 채 여유롭게 산책을 즐기는 모습이 언론 보도를 통해 드러났다”며 “건강상 이유로 재판 출석을 거부한 그의 행태는 눈 뜨고 못 봐줄 정도”라고 비난했다.
이어 “무릇 사람이면 나이가 들어갈수록 자신의 과오와 행위를 겸손하게 돌아보고 반성하는 게 어른다운 자세일 것”이라며 “그런데도 전씨는 반성은커녕 날이 갈수록 더 뻔뻔해지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라고 꼬집었다. 또 “법원은 강제구인 등 엄정한 법 집행에 즉각 나서야 한다”고 덧붙였다.
더불어민주당 광주시당은 “우리는 부끄러운 역사를 후대에 물려줘선 안 된다. 철면피와 같은 전씨를 지금 당장 단죄해야 하는 이유”라고 강조했다. 5·18 기념재단과 5월 3단체(유족회·부상자회·구속부상자회)도 같은 날 성명을 내고 “재판부는 재판 출석을 포기한 피고인 전두환의 방어권을 과도하게 보장해줘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재판부는 인정신문 절차도 없이 전씨의 불출석을 허가했다. 자의대로 첫 재판에 출석하지 않았는데도 아무런 불이익과 제재 없이, 전두환 측이 원하는 방식과 내용대로 (재판을) 진행하는 것을 묵과할 수 없다”고 했다.
한 단체는 “재판부는 일반 국민과 동일한 기준으로 전두환 재판을 진행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역사의 정의를 바로 세우는 공정한 재판을 진행해 달라”고 요구했다.
전 전 대통령의 다음 재판은 오는 8월 9일 오후 2시 같은 법정에서 열린다.
천금주 기자 juju79@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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