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업 추락재해 사망사고는 한국뿐 아니라 미국·일본·독일 등 주요 선진국의 산재 사망사고 사례에서도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대부분 안전난간 미설치, 개구부(채광 환기 출입 등을 위한 창이나 문) 덮개 파손, 노후 설비 유지, 안전모 미착용, 부주의로 인한 발 헛디딤 등 법규와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아 발생한 사고들이다. 이에 주요 선진국에서는 노사와 일반 국민이 참여하는 추락사고 예방 캠페인을 벌이는 등 노동자 생명 보호 조치가 이어지고 있다.
5일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과 e나라지표에 따르면 2019년 기준 한국의 사고사망만인율(노동자 1만명 당 사고사망자 비율)은 0.46‱(퍼밀리어드)로 일본(0.14‱)보다 3배가량 높았다. 미국(0.37‱)·독일(0.15‱)·영국(0.03‱) 등과 비교하면 최대 15배 이상 높은 수치다. 이에 많은 노동 전문가들은 한국 정부가 주요 선진국의 산재 사고 감축 사례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정책 수립 시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추락사고 위험요인은 현장서 즉시 알려야
미국 산업안전보건청(OSHA)은 2012년부터 건설업 노동자의 산재 사고 예방을 위해 ‘국가 떨어짐 재해 예방 캠페인’을 하고 있다. 매년 5월 첫째 주를 추락재해 예방 강조 주간으로 정하고 사업주·노동자·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추락 위험에 대한 경각심과 추락사고 예방 중요성을 알리는 캠페인이다. 이 캠페인은 ‘자발적 현장 참여’가 핵심이다. 노동자들은 업무를 잠시 쉬면서 고용주에게 건설현장의 추락 위험 요인을 제기하고 예방책을 함께 모색한다. 현장에서 빠르게 조처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이와 함께 OSHA는 건설업 산업재해 발생일과 도시명·고용주·사고 설명·사고조사 보고서 등을 담은 ‘추락 사망사고 지도’를 제작해 공개한다. 매년 3월은 사다리 안전의 달로 지정해 추락사고 예방 활동을 병행한다. 이런 노력은 건설업 노동자 추락사를 줄이는 데 효과적이었다. 미국의 건설업 노동자 수는 2017년 107만명에서 2018년 112만명으로 4.7% 늘었지만 건설업 추락재해 사망자 수는 389명에서 340명으로 12.6% 감소했다.
산업재해 사고사망만인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낮은 수준인 영국도 건설업 노동자 추락사고를 막기 위한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영국 안전보건청(HSE)은 매년 9월부터 12월까지 ‘사다리 추락재해 예방’ 캠페인을 벌인다. 자발적으로 작업장의 낡고 불안전한 사다리를 새 제품으로 바꾸는 사업주에게 교체비 50%를 지원하는 내용이다. HSE는 2007년에 캠페인을 시행한 후 2009년까지 3년간 7000여개의 불안전한 사다리를 교체했다. 2011년부터는 영국 사다리연합회가 캠페인 사업을 이어받았다.
싱가포르는 2005년부터 노동자의 부상과 질병을 예방하자는 취지로 ‘비전 제로’ 캠페인을 시행하고 있다. 고소(高所)작업 안전 인증·기업 감시 프로그램 정책과 함께 노동자 생명을 보호하는 안전체계로 자리 잡았다. 캠페인 시행 후 효과도 분명했다. 싱가포르의 산업 재해 사망사고만인율은 캠페인을 도입하기 전인 2004년 0.49‱에서 2018년 0.12‱로 약 75% 감축하는 데 성공했다.
촘촘한 기술로 ‘노동자 안전’ 뒷받침
각종 신기술로 노동자 추락사고를 예방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독일은 건설 현장에 능동형 추락방지시스템·수평안전대 부착설비·슬래브 거푸집 조립 시 추락사고 예방시스템 등을 적용하고 있다. 능동형 추락방지시스템은 안전대나 안전대 부착설비를 활용해 노동자의 활동 반경을 제한하고 추락 높이를 파악해 사고를 예방하는 역할을 한다. 또 추락위험 평가시스템을 개발해 주관적인 평가에 의존하던 기존 평가체계를 구체적으로 수치화했는데 이는 작업의 위험순위를 명확히 나열하는 효과를 냈다.영국은 2015년 ‘고소작업에 관한 제도’를 도입해 추락사고 감축 효과를 보고 있다. 발주자에게 건설공사 전 과정의 노동자 안전보건에 관한 책임을 부여하고 자체적인 안전관리 프로그램 개발·운영을 의무화한 것이다. 관련 기술개발도 활발하다. 영국은 철근구조물 지붕에 패널 등을 설치할 때 ‘펄린 트롤리(Purlin Trolly)’라는 레일이 깔린 이동통로를 만들어 자재나 작업자가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추락방호망이나 부착설비를 구축하기 어려운 시공 과정에는 에어매트를 활용토록 권고하고 있다.
사고 방치 기업 솎아내는 각국 정부
‘매의 눈’으로 건설업 노동자의 추락사고를 방치하는 기업을 적발하기 위한 각국 정부의 관리·감독 규제도 강화되는 추세다. 일본 정부는 건설사업 원·하청 간 유기적인 안전관리체계를 구축해 안전보건관리를 의무화하고 대상 공사별로 정해진 기간까지 공사계획서를 사전 제출하도록 의무화했다. 비계(임시가설구조물) 추락 등에 관한 특별교육을 하도록 관련 규정도 고쳤다. 추락방지 의무 기준 높이를 기존 5m 이상에서 2m 이상으로 확대 적용하고 작업발판·안전대 등 설치 요건도 강화했다. 싱가포르는 기업감시 프로그램을 운영해 안전보건 관리 실적이 저조한 기업을 대상으로 사망사고와 같은 중대 재해가 발생하거나 기업 안전관리 수준이 취약해 집중 관리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경우에 벌점을 부과하고 있다. 18점 이상이면 해당 기업은 공공사업 입찰 참여가 제한된다. 신규 외국인 근로자 채용이나 취업허가 연장조치에 관한 허가를 받기도 어렵다. 싱가포르 정부는 외국인 근로자 수요가 많은 자국 산업의 특성을 활용해 사업주의 법 준수 동기를 강화했다.
한 노동 전문가는 “최근 유엔무역개발회의가 한국의 지위를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처음 격상시킨 것은 의미가 있다”며 “노동자 안전사고 예방은 나라의 국격과도 연결될 수 있으므로 우리나라도 선진국에 걸맞은 안전체계를 갖춰야 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국민일보·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공동 기획
세종=최재필 기자 jpchoi@kmib.co.kr
[벼랑 끝 노동자 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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