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목사가 특별한 상주가 된 적이 있는가

입력 2021-07-05 09:55 수정 2021-07-05 11:05

고영기 목사(서울 상암월드교회, 예장합동 총무)

정치인 중에 전직 대통령이 서거하면 서로가 상주가 되겠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있다. 거기에는 진심도 있을 수 있고 정치적 계산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지난주 특별한 상주를 봤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의 소강석 총회장이다.

소 총회장은 지난 30일 전화로 다음 날인 7월 1일에 있을 예장통합 총회 임원들과의 연석회의부터 이후 모든 공식 일정을 불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생겼다고 통보했다. 아버지 같은 장로님이 소천을 하셔서 본인이 상주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의아했지만 소 총회장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충분히 이해가 됐다.

소천 하신 장로님은 새에덴교회 문정남 장로였다. 문 장로와 소 총회장은 한 장로와 목사 관계를 넘어서 친아버지와 아들과 같은 관계였다. 아니 혈육을 넘는 신앙적, 영적 특별한 관계를 맺은 사이였다.

문 장로는 소 총회장이 1980년대 개척을 하려고 했을 때 자신이 소유하던 200평 부지에 조립식 건물을 지어 줄 테니 광주에서 교회를 개척하자고 제안할 정도로 적극적인 후원자였다.

그러나 소 총회장은 그런 따뜻한 제안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서 서울 송파구 가락동으로 와서 개척했다. 그러자 문 장로 부부는 매주 광주와 서울을 오가며 주일 예배를 출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경기도 성남시 분당 구미동에 교회 부지를 구하고 예배당을 지을 때 재정의 3분의 1을 감당했다. 정말 브리스길라, 아굴라와 같은 헌신을 했다.

교회마다 그런 헌신자가 왜 없으랴마는, 문 장로는 가락동 개척교회 시절 소 목사가 오로지 교회 부흥에 올인 할 때 소 목사의 자녀를 돌볼 정도로 각별했다. 하나님은 오늘의 새에덴교회를 세우실 때 문 장로라는 주춧돌을 활용하셨다.

세월이 흘러 문 장로는 은퇴하고 다시 고향인 광주로 내려갔다. 이후 소 목사는 예장합동의 총회장이 됐다. 소 총회장은 최근 문 장로의 투병 소식을 듣는다. 소 목사가 교단 일정과 한국교회 연합, 세움을 위한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을 때 소 목사의 사모가 대신 문병을 했다.

그때만 해도 문 장로는 그렇게 위독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문 장로가 의식을 잃고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달됐다. 소 목사는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그 길로 광주에 내려갔다.

소 총회장이 중환자실에 들어갔을 때다. 소 총회장이 문 장로의 이마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하자 몇 주 동안 의식이 없던 상황에서 갑자기 눈을 뜨고 자신의 평생 담임목사를 알아보더라는 것이다.

“장로님,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지난날 장로님의 헌신과 희생 때문에 오늘의 새에덴교회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마지막 이별의 순간이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소 총회장은 다시 교회로 올라오고 문 장로는 다음 날 저녁,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소 총회장은 너무나 미안한 마음에 상주가 되기로 자청하고 광주로 내려갔다. 그는 빈소를 떠나지 않고 위로 예배와 입관 예배, 발인예배 그리고 화장 이후 대전 국립 현충원 안장 예배까지 모두 인도했다. 소 총회장과 문 장로가 진정한 에토스를 나눈 ‘소울 메이트’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나에게는 그런 소울 메이트가 있는가. 나 역시 17년 동안 예장합동 총회장을 지낸 고 최훈 목사님을 모셨다. 최 목사님이 소천하셨을 때 미국 LA까지 가서 상주 노릇을 해 본 적이 있었다. 그분은 내가 서울 동도교회 부목사로 17년 동안 모시던 담임목사님이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장로가 아무리 충성하고 헌신한다 하더라도 담임목사가 모든 일정을 포기하고 상주 노릇까지 하는 경우는 없다. 그것은 소 총회장과 문 장로가 소울 메이트가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 목사와 장로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 한국교회 안에 소 총회장과 문 장로처럼 각별한 만남과 동행, 이별과 같은 아름다운 미담이 많아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