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오페라하우스는 최근 9월 공연 예정인 창작오페라 ‘허황후’와 관련해 내용증명을 받았다. 지난 4월 8~10일 김해문화의전당에서 초연된 ‘허황후’의 이의주 연출가가 법무법인을 통해 보낸 것으로 김해문화재단과 지적재산권 관련 분쟁이 있으며 재공연될 경우 민형사상 법적 분쟁이 발생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김해문화재단이 가야사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제작한 ‘허황후’는 지난해 공모를 통해 김숙영 작가와 김주원 작곡가를 뽑았다. 이 연출가는 지난해 9월 ‘허황후’의 신선섭 예술감독으로터 연출 의뢰를 받고 초연에 참여했다. 갈등이 발생한 것은 김해문화재단이 대구오페라하우스 주최 제18회 대구국제오페라축제에 ‘허황후’를 출품하며 연출가로도 활동하고 있는 김숙영 작가로 연출을 교체했기 때문이다. 이 연출가가 김해문화재단에 연출을 비롯해 작품 전반에 자신의 창작이 들어간 만큼 저작권 협의를 해야 한다는 입장을 전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연출가는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연출 의뢰를 수락한 후 바로 대본 연구에 들어갔으며 10월부터 제작 스태프들과 회의를 진행하며 작품의 콘셉트를 제시했다”면서 “무대, 의상, 조명, 분장, 영상 등의 디자인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였으며 극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원작 대본에 없는 캐릭터들을 만들어 안무에 반영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내용증명을 받은 대구국제오페라축제는 최근 티켓 판매를 시작하며 온라인에 공개했던 ‘허황후’의 제작진과 출연진 리스트에서 연출가를 삭제했다. 당초 김 작가를 연출가로도 사진과 함께 공개했지만 논란이 일자 뺀 것이다. 박인건 대구오페라하우스 대표는 “김해문화재단과 이의주 연출가 사이의 갈등 때문에 대구가 난처하다. 수익이 나는 것도 아니고 창작오페라 발전을 위해 ‘허황후’를 초청했을 뿐이다”면서 “양측이 조금씩 양보해서 갈등을 풀길 바란다. 국내에서 창작오페라의 대부분이 초연 이후 사라지는 현실에서 ‘허황후’가 레퍼토리로 살아남으면 좋지 않겠느냐. 이런 갈등은 창작오페라 발전에 장애물이 될 뿐”이라고 말했다.
이번 논란은 국내 저작권법이 연출가를 배우와 같은 ‘실연자’로 규정해 저작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관련 있다. 국내 저작권법의 제4조 제1항 3호는 연극저작물을 ‘연극 및 무용·무언극 그 밖의 연극저작물’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무용 작품에 대해 안무가, 무언극에 대해 판토마이미스트를 각각 저작자로 인정한 데 비해 연극에 대해서는 연출가를 저작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대신 저작권법 제2조 제4호는 실연자에 대해 ‘저작물을 연기·무용·연주·가창·구연·낭독 그 밖의 예능적 방법으로 표현하거나 저작물이 아닌 것을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표현하는’ 주체라고 정의하면서 ‘실연을 지휘·감독·연출하는 자’가 포함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참고로 작가는 연극 공연의 기초가 되는 어문저작물의 저작자이다. 또 작곡가·조명디자이너·무대미술가 등은 각각 연극 공연에 이용된 음악·조명·무대미술에 저작권이 있는 것이지 연극 자체에 대한 저작권자가 될 수 없다.
이번 논란은 이 연출가가 대구 공연에 대해 자신을 오리지널 연출가로 표기하면서 저작권료를 일부 지급하라고 요구한 것에 대해 김해문화재단이 거부하면서 타협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김해문화재단은 이 연출가와 실연자 계약을 한 만큼 ‘허황후’에 대한 저작권 요구는 무리할 뿐만 아니라 ‘허황후’ 연보에 초연 연출로 이름이 들어가는 만큼 대구 공연에 표기할 의무가 없다는 입장이다.
김해문화재단 관계자는 “창작오페라 ‘허황후’는 2024년까지 이어지는 프로젝트인 만큼 디벨로핑을 위해 초연 이후 관객과 전문가 그룹의 리뷰를 받았다. 음악과 대본을 비롯해 전체적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 대부분이었다”면서 “대본을 쓴 김 작가가 오페라 연출가로도 활동하고 있어서 디벨로핑에 적임자라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이어 “이 연출가는 무대와 의상 등에 자신의 창작이 들어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해당 디자이너들은 이 연출가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의견을 참고했을 뿐이라는 입장이다”면서 “혹시라도 대구 공연에서 이 연출가의 저작권을 침해하는 부분이 있다면 저작권료를 내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연출가를 저작권자로 볼지 실연자로 볼지는 국가마다 다르다. 다만 근대 이전 연출가는 대본에 쓰인 대로 이행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현대연극에서는 연출가가 작품의 콘셉트를 정한 뒤 배우의 동선 및 조명·의상·음악·분장 등을 선택한다는 점에서 연출의 창작성을 인정해 저작자로 보는 추세다. 하지만 연극이 산업화하지 않은 분야이다 보니 아직도 연출의 저작권에 대해 구체적으로 정의하지 못하는 나라가 많다.
문제는 국내 저작권법이 연출가를 실연자로 보면서 그동안 연출가의 권리가 보호받지 못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허황후’의 경우 대구 공연에서 연출이 달라질 것이라고 공언하지만 국내 연극계나 오페라계에서 초연과 똑같은 작품을 재연하면서 연출가의 이름을 빼고 제작사나 극단의 대표로 바꾼 사례를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김해문화재단과 이 연출가 모두 ‘허황후’의 법적 소송을 통해 국내 공연계에서 연출가의 저작권이 법적으로 정립되길 바라고 있다. 법조계에서도 ‘허황후’가 실제 소송으로 갈 때 저작권과 관련한 좋은 판례가 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저작권 전문가인 홍승기 변호사 겸 인하대 로스쿨 교수는 “우리 저작권법이 연극의 연출가를 실연자로 묶어 두고 있으니 연극저작물은 아예 저작권 등록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연출가도 안무가와 마찬가지로 연극의 영상물, 스틸사진, 연출노트 등을 이용하여 저작권 등록을 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 “우선 연출가를 실연자로 파악하는 저작권법 규정을 개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