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공연 중인 연극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는 시각·청각·후각을 자극하는 독특한 작품이다. 우선 공연장에 들어서는 순간 향기가 코를 간질이더니 눈앞에 생화를 비롯해 풀, 이끼 그리고 작은 연못이 있는 정원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작품 제목처럼 정원이 배경인 이 작품은 또 공연 내내 피아노, 플루트, 바이올린, 첼로 사중주의 선율을 비롯해 새소리, 물 떨어지는 소리, 옷깃에 이는 바람 소리 등이 들린다. 소극장에 60개나 설치한 스피커 덕분에 사운드의 향연이 펼쳐진 것이다.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냐르의 ‘읽는 희곡’… 세계 초연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는 세종문화회관이 2018년 S씨어터 개관 이후 실험적이고 다양한 형태의 공연을 연간 1회씩 선보이는 ‘컨템포러리S’의 세 번째 작품이다. 컨템포러리S는 그동안 외부 단체와 협업으로 진행되는데, 이번 작품은 1인 제작사 ‘크리에이티브 테이블 석영’이 함께 했다. 제작사 대표이자 이번 작품을 이끈 프로듀서(PD) 석재원은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를 통해 관객에게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싶었다”면서 “하지만 그 준비는 물론 유지하는 과정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석 PD는 “개막 이전에 실제 생화를 써야 할지 말지 고민했고, 결정 이후에는 꽃이나 이끼가 소극장 환경 안에서 얼마나 싱싱하게 유지될 수 있는지 테스트해야 했다. 그리고 개막 이후엔 매일매일 무대 위 꽃에 물을 줘야 할 뿐만 아니라 분갈이를 통해 꽃을 교체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민달팽이, 거미, 여치가 발견돼 공연장 밖으로 내보내기도 했다. 여기에 연못의 물도 종종 갈아줘야 하는 등 다른 작품과 비교해 손이 많이 간다”면서도 “작품이 담고 있는 아름다움이 관객에게 감각적으로 전달되는 만큼 고생스럽지 않다”고 덧붙였다.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는 영화로 잘 알려진 ‘세상의 모든 아침’의 원작소설을 쓴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냐르의 2017년 희곡을 토대로 했다. 미국 뉴욕주 제너시오의 성공회 사제이자 음악학자였던 시미언 피즈 체니의 실제 이야기를 담았다. 시미즈는 딸 로즈먼드를 출산하다 숨진 아내를 그리워하며 아내가 사랑했던 정원을 그리움으로 정성껏 가꾼다. 그는 특히 정원의 새소리와 물소리, 바람 소리를 악보에 적은 기보 ‘야생 숲의 소리’를 출판사에 보내지만 거절당한다. 딸은 아버지의 무관심 속에 사제관 밖에서 성장한다. 성인이 되어 돌아온 딸은 아버지의 노후를 지키는 한편 ‘야생 숲의 소리’를 사비로 출판한다. 희곡에는 나오지 않지만, 자연의 소리를 음악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야생 숲의 소리’는 훗날 드보르자크나 메시앙 등 여러 작곡가에게 영향을 미친다.
키냐르가 희곡 형태로 처음 쓴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는 무대를 위한 희곡이라기보다는 ‘읽는 희곡’이다. 책 발매 후 프랑스 아비뇽에서 키냐르가 사운드에 초점을 두고 낭독극처럼 공연한 적 있지만, 실제 무대화는 이번이 세계 초연이다. 출판되지 얼마 안 된 데다 독특한 스타일의 이 작품이 석 PD의 마음을 사로잡기까지는 몇 번의 필연적인 우연이 겹쳐졌다.
“2019년 제주도 절물휴양림에 갔을 때 뒤에서 걷던 관광객들이 이야기를 듣게 됐어요. 새소리와 물소리 등 자연의 소리를 기보한 작곡가 시미언 피즈 체니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흥미롭게 생각했지만 더 나아가지 못했는데요. 그로부터 몇 달 뒤인 지난해 초 프랑스의 지인이 제가 좋아할 만한 책이라며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를 선물해 줬습니다. 그리고 저와 마찬가지로 책을 읽고 감동을 받았던 이진욱 작곡가와 우연히 이 작품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됐습니다. 그때 연극으로 제작해야겠다고 결심했죠.”
크리에이티브 테이블 석영, 독특한 작품들로 정평
준비 과정은 만만치 않았지만 독특한 스타일의 이 작품은 개막 직후 화제를 모으며 좌석을 구하기 어려울 정도다. 크리에이티브 테이블 석영에서 제작한 ‘비 BEA’ ‘내게 빛나는 모든 것’ ‘새닙곳나거든’ ‘하이젠버그’ 등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주제나 형식 면에서 관객을 자극하고 있다. 최근 국내 공연계에서 1인 제작사로서 뚜렷한 흔적을 남기고 있는 석 PD의 작품 선택 기준은 무엇일까.
“작품을 선택할 때 저는 직관적인 편이에요. 예를 들어 해외 라이선스 작품의 경우 ‘비 BEA’와 ‘하이젠버그’는 신문이나 SNS 속 작품 사진에서 시작됐습니다. 사진이 작품의 분위기를 보여주잖아요. 물론 이후 대본을 찾아서 읽고 해당 작품의 리뷰를 검색합니다. 평소 해외 공연 리뷰를 열심히 읽는 편이에요. 또 제 성향을 아는 잘 아는 번역가나 에이전트가 작품을 추천해 주면 관련 자료를 열심히 찾아보기도 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친 뒤 제가 제작을 잘 할 수 있을지 판단합니다. 작품은 좋아도 제 색깔을 낼 수 있는 제작이 어려울 것 같으면 주변에 추천합니다.”
2019년 국내 초연된 연극 ‘와이프’와 2020년 ‘궁극의 맛’은 석 PD가 연출가 신유청에게 추천해 무대화된 작품이다. 비록 석 PD가 제작한 것은 아니지만 신유청은 ‘와이프’로 2020년 백상예술대상 연극상을 받았다. 석 PD는 “(신유청의 수상이) 내 일처럼 기뻤다. 작품에 대한 내 시선이 나쁘지 않은 것을 확인해서 좋았다”고 웃었다.
다양한 제작사 거치며 공연 프로듀서로 자리매김
유치원 시절 세종문화회관에서 본 연극 ‘피터팬’을 보고 공연계에서 일하는 것을 꿈꿨다는 그는 프랑스 유학 후 한국에서 크고 작은 제작사를 거쳤다. 뮤지컬 ‘명성황후’ 무대 크루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그는 2005년 떼아뜨르 추에서 기획자로서 일을 시작했다. 첫 기획 작품은 ‘강풀의 순정만화’로 웹툰의 무대화의 시초가 됐다. 그리고 뮤지컬해븐에서 기획팀장으로 ‘스프링 어웨이크닝’ ‘메노포즈’ ‘쓰릴미’ 등의 제작에서 실무자로 활약했으며 엠뮤지컬컴퍼니에서 ‘삼총사’ ‘캐치미이프유캔’의 제작감독으로 일했다. 이후 프리랜서로 연극 제작에 참여하던 그는 2016년 안락사 소재의 연극 ‘비 BEA’를 우란문화재단의 100% 지원으로 만들면서 지금의 회사를 설립했다. 그는 2019년 3월 제주도 구좌읍 종달리에 문을 연 국내 최초 해녀 극장식 레스토랑 ‘해녀의부엌’에 지난해 초부터 동참하고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출신의 김하원 대표는 공연계에서 산전수전 겪는 석 PD를 영입해 외부의 창작 스태프를 불러모으고 조직을 체계화했다. 지역 기반의 성공적인 스타트업으로 각광받는 ‘해녀의 부엌’은 올해 제주도에 2호점을 낼 계획이다.작품 기획부터 제작 및 투자까지 다양한 영역을 담당하는 공연 프로듀서는 점점 역할이 구분되는 추세다. 석 PD의 경우 독립 프로듀서이기 때문에 모든 역할을 해야 하지만 창작에 좀 더 깊숙이 관여하는 크리에이티브 프로듀서의 역할에 특히 매력을 느낀다. 실제로 2019년 1월 초연된 ‘새닙곳나거든’의 경우 움직임과 소리로 시조를 그려낸 작품으로 석 PD, 배우 지현준, 강양원 연출가, 김시율 음악감독, 임영욱 작가 등 5명이 공동창작했다.
석 PD는 “‘새닙곳나거든’은 성수동으로 우란문화재단이 이전한 후 개관 축제의 일환으로 작업하게 됐을 때 하나의 감정에 집중한 작품을 만들고 싶어 시도했다. 몇 달씩 다른 4명의 공동창작자와 작품에 대해 함께 고민한 끝에 나온 작품이다”면서 “세계 초연인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도 이진욱 음악감독과 계속 작품을 분석한 덕분에 나오게 됐다”고 밝혔다. 이어 “‘새닙곳나거든’이나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 같은 작품을 통해 창작에 대한 욕망을 해소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새닙곳나거든’ 등 여러 작품이 보여준 시노그래피는 최근 그에게 콘서트 연출가로 데뷔할 기회를 만들어줬다. 전통을 기반으로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창작과 융복합 형태의 전통예술콘텐츠를 지향하는 그림(The林)이 그에게 콘서트 연출을 제안한 것이다. 그는 지난 4월 창작국악그룹 그림(The林) 콘서트 ‘블랙무드 여백의 반영’을 연출해 호평을 받았다. 그는 “그림의 프로듀서가 제 작업들에서 텍스트를 시각적으로 해석하는 ‘시노그래피’를 좋게 봤다. 내년에 음악 콘서트를 계획하고 있는데, 연출을 직접 할지 고민”이라면서 “나는 창작자들과 이야기해서 그 장점을 빼내는 프로듀서로서 강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마치 인력소개소처럼 어떤 작품에 어떤 창작진이 맞는지 잘 안다. 하지만 서사를 꼼꼼하게 분석한 연출은 나에게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림 콘서트 이후 어린이 오페라 등의 연출을 제안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고 밝혔다.
국내 공연계에 새 바람 일으키는 독립 프로듀서들
석 PD를 비롯해 독립 프로듀서들은 최근 국내 공연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2010년대 공연계에서 공공의 영역이 비대해지면서 민간의 전문가들이 안정성을 찾아 지자체 문화재단이나 공공극장을 택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비관습적이고 창의적인 작업을 통한 새로운 흐름은 공공이 민간을 따라갈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우란문화재단과 두산연강재단 등 민간의 문화재단이 독립 프로듀서에게 공연 제작 기회를 제공해 성공하면서 최근 세종문화회관, 정동극장 등 공공극장에서도 독립 프로듀서와의 협업을 통해 성과를 내고 있다.
석 PD는 “공연계에서 독립 프로듀서들만큼 개성이 강하면서 발빠른 사람들이 없다. 저처럼 상업극을 하는 프로듀서를 비롯해 다양한 전문 분야를 가진 독립 프로듀서들은 공연계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불씨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면서 “최근 국내 공공극장에서 독립 프로듀서와의 협업을 긍정적으로 보게 돼 다행이다. 다만 영국 등에서처럼 독립 프로듀서들이 공연계에서 계속 작업할 수 있도록 제도적인 지원 장치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