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은 점령군, 소련군은 해방군”? [국민적관심사]

입력 2021-07-02 00:30 수정 2021-07-02 00:30
1946년 5월경 정의여고 2학년 김옥숙 학생이 러시아어 단어를 칠판에 쓰고 있다. 소련군이 진주한 후 북한의 각급 학교에서는 러시아어를 제1외국어로 지정하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김옥숙 학생은 전쟁 때 가족과 함께 월남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뉴시스

소련군은 해방군이고 미군은 점령군일까. 김원웅 광복회장이 한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보낸 영상 메시지가 논란이 되면서 때아닌 역사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김 회장은 지난달 21일 양주 백석고등학교 학생들에게 보낸 영상 메시지에서 “해방 이후에 한반도가 남북으로 갈려서 북한엔 소련군이 들어오고 남한엔 미군이 들어왔다”며 소련군은 들어와서 곳곳에 포고문을 붙였다. 그 포고문엔 ‘조선인이 독립과 자유를 되찾은 것을 축하한다. 조선의 운명은 향후 조선인들이 하기에 달렸다. 조선 해방 만세’라고 적혀 있었다. 포고문 뒤에는 ‘해방군 소련 대장 치스차코프’라고 쓰여 있었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그러면서 “비슷한 시점에 미군이 남한을 점령했다. 맥아더 장군이 남한을 점령하면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이다. 앞으로 조선인들은 내 말을 잘 들어야 한다. 내 말을 안 들을 경우에는 군법회의에 회부해서 처벌하겠다. 그리고 모든 공용어는 영어다.’ 이런 포고문을 곳곳에 붙였다”고 주장했다. 해방군이었던 소련군과 달리 미군은 점령군 행세를 하며 조선인에게 위압적으로 굴었단 얘기다.

광복회 홈페이지 캡처

이후 김 회장의 해당 발언을 지적하는 언론 보도가 잇따르자 광복회는 1일 반박 성격의 보도자료를 냈다. 광복회는 보도자료에서 “김 회장은 ‘역사적 진실’을 말한 것뿐”이라며 “한국 국민이라면 마땅히 한국인을 무시한 맥아더를 비판해야 한다. 맥아더의 한국 무시 사실을 밝힌 김 회장을 비난하는 건 납득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포고문 등에서 한국 국민을 업신여긴 맥아더를 비판하지 않고 왜 사실을 말한 김 회장을 비판하느냔 항변이다.

광복회 보도자료 캡처

그렇다면 김 회장의 말처럼 소련군은 해방군이고 미군은 점령군이었을까. [국민적 관심사]는 김 회장 발언 내용의 사실 여부 검증을 위해 직접 해당 포고문을 살펴봤다.

미군 포고문, '점령군' 표현 있지만…

김 회장이 언급한 미군의 포고문은 1945년 9월 9일 더글러스 맥아더 당시 미 육군 총사령관이 발표한 ‘남한 점령 태평양 주둔 미군사령관 포고 제1호’로 보인다. 해당 포고문 전문(全文)은 국사편찬위원회의 ‘우리역사넷’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홈페이지 캡처

해당 포고문을 읽어보니 미군이 자신을 ‘점령군’이라고 부른 건 사실이었다. 포고문엔 “본관의 지휘하에 있는 승리에 빛나는 군대는 금일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 영토를 점령한다”거나 “점령군에 대한 모든 반항행위 또는 공공안녕을 교란하는 행위를 감행하는 자에 대해서는 용서 없이 엄벌에 처할 것”이라는 표현 등이 등장한다.

하지만 미군은 자신들이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해방 독립시키라는 연합국의 결심을 명심”하고 있으며 “점령의 목적이 항복문서를 이행하고 그 인간적 종교적 권리를 확보함에 있다”고도 했다. 김 회장의 발언이 절반의 사실만을 전한 것이다.

소련군, ‘해방군’ 자처했으나…

김 회장의 발언처럼 소련군이 해방군을 자처한 건 사실이다. 소련군은 포고문에서 “붉은 군대는 조선 인민을 일본 침략자들의 압제에서 해방시키고 그에게 자유와 독립을 찾아 주었다”며 “당신들의 해방군인 붉은 군대에 백방으로 방조하라(도우라)”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점령군’이라고 표현하지도 않았다. 포고문의 문언만 놓고 보면 소련군이 미군보다 조선에 우호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홈페이지 캡처

하지만 포고문 내용만으로 ‘소련군정이 미군정보다 나았다’고 말하긴 어렵다. 당시 북한에 진주했던 소련군이 약탈과 폭력 등 여러 비행을 저질러 원성이 컸다는 사료도 많기 때문이다. 미국 우드로윌슨센터가 구 소련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견한 보고서가 대표적이다. 당시 소련군 대령이었던 ‘페드로프’가 북한 지역을 둘러본 뒤 1945년 12월 29일 작성한 이 보고서엔 북한 지역에 진주한 소련군에 의해 “매일 그리고 어디서나 엄청난 수의 약탈, 폭력 그리고 이와 유사한 사건들이 벌어진다”며 “이는 그들이 처벌받지 않기 때문”이라고 적혀있다.

1945년 12월 29일 당시 소련군 대령이었던 페드로프가 북한 지역을 둘러본 뒤 작성한 보고서. 미국 우드로윌슨센터가 구 소련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찾아 영어로 번역했다. 오른쪽 소제목 '부대의 정치 및 사기 상태'(THE POLITICAL AND MORALE CONDITION OF THE TROOPS) 이하 부분이 북한에 진주했던 소련군이 보인 여러 행태를 서술하고 있다. 우드로윌슨센터 홈페이지 캡처

종합해보면 김 회장의 발언은 절반의 사실이다. 미군이 포고문에서 자신을 ‘점령군’이라고 부른 건 사실이지만, 자신의 역할을 ‘조선의 해방·독립’으로 밝히기도 했기 때문이다. 소련군 역시 스스로를 ‘해방군’으로 규정한 건 사실이지만, 김 회장의 전체 발언 맥락처럼 ‘미군과 대비되는 착한 군대’로 보긴 어렵다. 소련군의 여러 악행을 저질렀음을 보여주는 사료도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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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명진 기자 am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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