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추행 숨기려…만취 아닌 이 중사에 “정신 차려” 반복

입력 2021-06-30 05:22 수정 2021-06-30 10:16
뉴시스

“장 중사님, 저 내일 얼굴 봐야 하지 않습니까.”

성추행 피해 뒤 극단적 선택을 한 공군 이모 중사의 유족 측 김정환 변호사가 지난 29일 차량 블랙박스 영상을 공개했다. 블랙박스엔 이 중사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지난 3월 2일 원치 않는 회식에 참여한 뒤 관사로 복귀하던 중 차 안에서 선배 장모 중사에게 성추행을 당한 그는 절박한 목소리로 거부 의사를 밝혔다.

이 중사의 거부에도 성추행은 이어졌다. 장 중사는 운전하는 후임 부사관이 눈치채지 못하게 이 중사가 많이 취한 것처럼 “정신 차려”라는 말을 거듭했다.

결국 이 중사는 차량이 부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숙소를 한참 남겨두고 내려 달라고 했다. “나 여기서 내려줘”라는 이 중사의 말에 운전자는 “괜찮으시겠습니까”라고 물었고, 이 중사는 “응, 그냥 걸어가면 돼. 조심히 들어가”라고 인사한 뒤 하차했다.

조금 뒤 장 중사도 차에서 내려 이 중사가 간 방향으로 걸어가는 장면으로 블랙박스 영상은 끝났다. 영상 초반, 선임인 노모 상사가 먼저 차에서 내리며 뒤에 타고 있던 장 중사와 이 중사를 향해 “한 명 앞에 타”라고 말했지만, 장 중사가 “안 타도 돼”라고 반말로 거부하는 장면도 담겼다.

이 중사는 당시 상황이 고스란히 담긴 블랙박스를 직접 확보해 군사경찰에 제출했다. 하지만 제20전투비행단 군사경찰대대는 이를 사실상 누락한 것으로 알려졌다.

MBC PD수첩은 ‘2차 가해’ 혐의 등을 받는 20비행단 정보통신대대장과 노모 준위가 사건 직후 이 중사 부모를 만났을 때의 육성도 공개했다.

정보통신대대장은 이 중사 부모에게 “어쨌든 이 중사 보호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가해자하고 피해자하고 완전히 분리하고,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지은 죄만큼 처벌받을 수 있게, 그런 것들이 정상적으로 진행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노 준위도 “요즘엔 성 관련 사건이 피해자 기준이기 때문에 안에서 조사한다고 걱정을 하시거나 이러실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노 준위는 노 상사와 함께 이 중사가 신고하지 못하게 회유하고 압력을 행사한 혐의로 지난 12일 구속됐다. 유족 측이 고소한 정보통신대대장도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고 있다.

박은주 기자 wn1247@kmib.co.kr